제목 없음
 

 




  송종호(2019-06-01 21:32:29, Hit : 66, Vote : 10
  토요 살롱 263회 " 백 련 산 "

하늘 정원 동쪽으로 배수지가 있는 정상을 향한 둔덕과 남쪽 소나무 숲과 경계한 둔덕을
하얀 꽃이 만발해 뒤덮고 있다. 국화라고 한다.
가을에 피는 노란 국화가 품종 개량을 한 탓인지 흰색에 여름도 오기 전에 만발하고 있다.
정원 둘레 목책을 휘감고 올라간 장미 넝쿨에는
무성한 녹색 잎 사이로 새빨간 장미가 송이송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목책 앞으로 1m 간격의 좁은 보도를 사이에 두고 정원을 두르고 있는 장미나무에도
큼지막한 분홍색 장미가 군데군데 소담스레 피었다.
어디선가 어렴풋이 바람에 실려 와 코끝을  핥고 지나가던 아카시아 향기도
어느새 슬며시 사라지고 계절의 여왕 장미의 계절이 돌아왔다.
그리고 극성을 부리던 미세먼지도 동풍과 함께 사라지고
아직은 낮에도 25도를 넘지 않으며 아침과 저녁으로는 선선하지만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 될 6월에 접어들었다.

지난 4월 11일 일이가 뜬금없이 단체 톡 창에 응암 동 조 혜인 네 방문 겸
백련산 산보를 위한 번개 팅을 제안하는 글을 공지했다.
혜인 네가 일요일이 편하다고 하여 가급적 가까운 일요일인 21일이나 28일,
시간은 오전 10시 혹은 오후 4시 중에 택일하는 내용으로 공지하여 의견을 수렴한 결과
21일 오후 4시와 28일 오전 10시 두 팀으로 나누기로 하고
서울 문리대 사회학과 동기들과 혜인 네를 먼저 가 본적이 있는 일이가
수고스럽지만 두 팀을 모두 인솔하기로 했는데
21일 팀은 일이, 남환이, 두환이, 나와 진규로 짜여 졌고
28일 팀은 일이와 멀리 제주에서 흥면이가 올라오고 승헌이가 동참하기로 했다.

우리 동기로는 혜인이와 일이, 그리고 충북 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퇴직한
강 희경, 이렇게 셋이 서울 문리대 사회학과 같은 학번 동문들이다.
같은 학과에 동기들이 셋이나 있어서인지 일이와 희경이가 번갈아 동기 회장을 하면서
길흉사에는 떼거리로 참석하는 등 그 결속력이 대단한 거 같았다.

나는 일이가 백련 산을 단체 톡 창에 올리기 전에는 서울에 그런 산이 있는지도 몰랐다.
부랴부랴 인터넷을 검색해보니까 은평구 응암 동과 서대문구 홍은 동에 걸쳐 위치한 산으로
높이가 해발 고도가 260m인 남산보다 조금 낮은 215m이고
신라시대에 창건한 고찰인 백련사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왕족들이 백련산 바위에서 매사냥을 즐겼다고 해서 응봉이라고도 불렸다는데
응암 동이란 동명도 거기에서 유래되지 않았나 유추해 본다.
일이 덕분에 난생 처음 백련 산을 올라가 보았는데 잘 꾸며 놓은 산책로 양 옆으로
아름드리나무가 빽빽이 숲을 이루고 곳곳에 심어 둔 꽃들과 수풀이 잘 조화를 이룬
수려하고 아기자기한 아름다운 산이었다.
근처 주민들이 자신들의 휴식처인 산을 잘 가꾸고 관리한 흔적이 여실히 들어났다.
정상에서 내려다 둘러본 전경도 앞이 탁 트이며
서부 서울의 풍경이 시원하게 한눈에 들어왔다.

혜인이는 10년 전 쯤 중학교 입학 이후 40년 이상 해 오던 하숙 생활을 청산하고
북아현 동에 집을 장만하고 이사해 혼자 살다가
2013년 환갑 나이에 17년 연하의 서울 대 문리대 후배와 결혼해서는
와이프가 혼자서 살던 집은 정리하고 자기 집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마지막으로 하숙 하던 곳이 합정 동이었는데 그 집에서 상당히 오래 하숙했다고 한다.
2년 전 혜인이 부부와 같이 합정 동 한강변 기독교 순교 성지 공원을 돌아보고
그 집 근처를 지나게 되었을 때 자기가 하숙 하던 집을 가리키며
잠시 추억에 젖어 감회를 떠올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었다.

혜인이 부인은 서울 대 문리대 외교학과 출신으로 대학에서의 전공과는 180도 다른
이과 과목으로 미국과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 온 다양한 학력의 재원이다.

북 아현동 혜인이네는 혜인이가 집을 장만하고도 친구들에게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그 전에 혜인이 집을 가 보지 못했었다.
그래서 비록 집 장만해 이사한 지 수 년이 지났고
결혼 한지도 2년이나 지나 신혼은커녕 이미 구혼에 접어들었는데도
혜인이가 결혼 할 때 도둑장가 가듯이 친구들에게 연락도 하지 않았고
결혼해서도 친구들을 한 번도 집에 부르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집들이하라고 윽박질러
친구들 여러 명이 어울려 2015년에 처음으로 가 본 후 2017년 가을까지
친구들과 함께 혹은 혼자서 여러 번 다녔었지만
지난 해 봄에 이사한 응암 동 집은 이사했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아직 가 보지 못 했었다.

일이가 짠 21일 일정은 오후 4시에 6호선 새절 역에서 만나
가볍게 산책 삼아 백련 산을 올랐다 내려와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혜인 네를 들리는 순서였다.

지지난 해 2017년, 가을의 한 복판이던 10월 말에
나날이 거동이 불편해지고 있었지만
아직 부축하면 천천히 10분 정도는 걸을 수 있었던 혜인이 부부를 태우고
혹시 몰라 휠체어를 혜인이가 눈치 채지 못하게 몰래 싣고
순천 만 국가 정원과 순천만 습지 갈대밭을 거쳐
여수에서 2박하며 금오 도까지 다녀온 후 일 년 반 만에 혜인 네는 처음 가는 길이었다.

마지막으로 여수에 갈 때만 해도
혜인이 부인에게 순천에서는 많이 걸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휠체어가 필요할 거 같으니
어차피 장만해야 하니까 이참에 하나 좋을 거로 마련해 가져가자고 해
부인이 구입을 했는데 이걸 알고 혜인이가 자기를 장애인 취급한다며 불같이 화를 내
부인이 엄청 구박을 받고 시달렸었다.
당장 갖다 버리라고 해 버리는 척 하고 들고 나와 자전거 두는 곳에
몰래 숨겨뒀다고 했다.
그래서 순천 만 습지 공원 갈대밭에서 완강하게 버티는 혜인이를 휠체어에 태우는데  
부인과 둘이서 진땀을 흘려야만 했었다.

지지난 해 여수를 갈 때 부인이 이미 북 아현동 집을 내 놓았었다.
5층 빌라 형 아파트였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계단으로 오르내려야 했는데 혜인이네는 4층이라 성한 사람도 다 올라가면 숨이 찰 정도였다.
그래서 부인이 혜인이가 더 불편해지기 전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로 옮기려고
북아현 동 가까운 곳에 이사 갈 집으로 새로 지은 아파트를 알아보고 있었다.
가급적이면 추위가 닥치기 전에 이사 갈 요량이었다.

여수를 마지막으로 다녀온 후 그럭저럭 세월이 흐르는 동안
혜인이 부인이 가끔씩 혜인이 동향을 단체 톡 창에 올리는 거만 접하다
지난 3월 말 혜인이 부인이 단체 톡 창에 올린 사진 한 장이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아파트 단지 내 산책로인 듯한 곳에서
두터운 겨울용 파커와 귀를 완전 덮는 털모자로 중무장한 혜인이가
눈을 반쯤 내려감은 채 무심한 표정으로 탄 휠체어를 부인이 뒤에서 밀고 있는 모습이었다.
두발을 안정적으로 발 안장에 가지라니 얹고 두 손으로 휠체어 난간을 꼭 잡은 모양새가
이미 휠체어에 잘 적응된 모습이었다.
말을 듣지 않아도 그 간의 사정이 이야기 엮이듯이 마음속에 펼쳐지고 그에 따라
두 부부의 모습이 겹쳐지고 어른거리며 마음이 아려왔다.
가봐야겠구나 하고 있는 차제에 때 마침 일이가 백련산 번개 팅 멤버 모집 공고를 냈다.

사회학과 동기들과 먼저 다녀 온 일이가 그 간의 사정을 대충 이야기해 주었다.
하루에 3시간을 봐 주는 요양사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고
목욕만 시켜 주는 보조원이 일주일에 두 번 온다고 했다.
신장도 부실하고 혈압도 높고 대소변을 못 가려 기저귀를 차고 있고
일어서는 힘을 완전히 상실해 앉아 있거나 누워만 있어야 되고
식사도 유동식을 빨대로 빨아 먹는다고 했다.

전 날 하프 마라톤 21km를 완주해 아직 다리가 덜 풀렸지만
별 무리 없이 백련 산을 정상까지 올라갔다 내려와
혜인이 부인이 추천했다는 근처 헐직하고 푸짐한 횟집에서 간단한 반주 곁들여 저녁을 하고
혜인 집에 들어서자 그제나 저제나 학수고대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혜인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맞아주었다.
‘송 선생님이 오신다고 미리 알려주었거든예. 너무 좋아하시며 여태 기다리셨어예.’
혜인이 부인은 경북 경산 출신으로 경산 여고를 졸업했는데
고교 이후 30년을 대학 졸업 후 일본과 미국을 유학 차 몇 년 다녀 온 걸 제외하면
거의 서울에서 살았는데도 경상도 억양과 어투와 사투리가 전혀 변함이 없다.

“조 박사, 잘 지냈어?”

‘어허,’ 하며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두 손을 맞잡으며 바라보는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리고 못 보던 1년 반 사이에  모습이 많이 변해 있었다.
걷지 못해 다리의 근육이 다 빠져 홀쭉했고 10대 때 이래로 몸이 통통했었는데
유동식이 아무래도 칼로리 조절이 되는지 배도 쑥 들어가고
전체적으로 많이 왜소해져 있었다.

혜인이는 원래 어떤 종목이던 운동에 관심이 없었고 운동을 싫어했다.
운동이라기보다 몸을 움직이는 거 자체를 귀찮아했다.
혜인이가 뛰는 걸 본 적이 없고 걸음걸이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뒤뚱뒤뚱 천천히 마지못해 걷는 모양새다.
아무리 급해도 절대 보속이 빨라지지 않았다.
다들 뛰다시피 하며 재촉을 하는 대도 뒤에 멀찌감치 쳐져 천천히 걸어왔다.

언젠가 북 아현동 집에 들렀다 저녁까지 먹고 느지막이 돌아가는 길에
혜인이 부인이 버스 정거장까지 바래다준다며 따라 나와,

“교수님이 평소에 운동을 좀 하셨으면 하다못해 하루에 한 시간씩 걷는 거라도 하셨으면
이런 병이 안 걸렸을 수도 있었겠지예?
가끔씩은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어예. 몇 년 살아보지도 못하고.“

동의를 구한다기보다 혼자 말처럼 마치 자신의 잘못인양 자책하는 거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이미 어둠이 짙게 깔린 아스팔트바닥을 내려다보며
조그만 목소리로 그냥 흘러 지나가듯이 그러나 애잔한 음색이 깊게 베인
애처로운 목소리로 조근 조근 말 한 적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잘못을 돌리고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어 하는
어둠에 묻힌 탓인지 그날따라 유난히 아직 자그마한 단발머리 소녀 같이 보인 모습이
아직도 마음속에 아련히 남아 있다.

혜인이 부인은 자기 남편에 대한 호칭이 예전 현직교수 시절에는 반드시 교수님이었고
퇴직한 이후에는 박사님이다.
지금도 남편을 부를 때 ‘조 박사님’ 하고 부른다.
그리고 여하한 경우에도 존대 말을 쓴다.
남편이 불치병에 걸려 의사 표현을 제대로 못하고 의식이 오락가락 하기도 하고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대소변도 못 가리며 병상에 누워 일상을 보내고 있어
온갖 치다꺼리를 다 해야 하는데도 마치 어린아이 돌보듯 해야 하는데도
여전히 공경하는 모습이 짠하기도 하지만 보기가 좋고
오히려 그 속에 내포한 부인의 자존심을 보는 거 같기도 해 내심 흐뭇해지기도 한다.

친구인 우리를 호칭할 때도 누구누구 씨라고 부른 적이 없다. 무슨 선생님이다.
송 선생님, 김 선생님, 이런 식이다.
물론 한성이나 명식이 같은 교수들에 대한 호칭은 무슨 교수님이다.
상대방이나 제3자를 예우한다고 해서 자신의 위신이 깎일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오만한 발상이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경우가 훨씬 많다.

머리도 빡빡머리였다.
‘요양사가 머리 관리하기도 힘들고 머리 깎으러 미장원에 다니기도 힘들다고
깎아 주셨어예.‘
나만 반가워한 게 아니라 같이 간 친구들, 일이, 진규, 남환이 하나하나 손을 잡고
반가움과 찾아 준 데 대한 고마움에 눈물을 글썽였다.
아직은 옛 친구들을 다 알아보고 이름도 죄다 기억하고 옛날 있었던 에피소드도 다 기억한다.
그래서 예날 학창시절 이야기를 해 주면 아기같이 입 양 꼬리를 올리며 좋아한다.

고향인 여수를 항상 그리워하고 향수에 젖어 있어
여수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걸 제일 좋아한다.
고향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해,
‘여수가 우리나라에서 관광객이 제일 많이 가는 곳이래.
연간 1,300만 명이 다녀가 그 동안 부동의 관광 1위였던 부산을 눌렀다는 거야.
내가 여러 나라를 다녀봤지만 내가 가 본 중에서는 여수가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이야.‘
해 주면,
‘그으래?’ 하며 흐흐흐 함박웃음과 함께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혜인이는 고향인 여수를 그리워하는 이상으로 자기 부인을 사랑한다.
무심한 성격의 혜인이가 가장 사랑할 뿐만 아니라
아마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부인이지 않을까 싶다.
혜인이는 평소에도 누구를 그렇게 그리워해 하지도 않았고 보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타인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관심한 편이었다.
사물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다.
고향인 여수 외에 어디도 가고 싶어 하는 곳이 없었다.
학교와 집을 오가는 거가 거의 유일한 행동반경이었다.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 외에는 집에서 독서와 집필에 매진하다 좋아하는 음악 듣고 하며
혼자 보내는 시간을 더 즐기는 편이었다고 할까.

부친과는 혜인이가 어렸을 때 일찌감치 이별하였고
모친은 혜인이가 줄곧 봉양하다가 결혼 한 이듬해인 2014년에 돌아가셨다.

위로 형님이 두 분 계셨는데 학창시절 우리가 여수 놀러 가면 횟집으로 데리고 가
싱싱한 회와 술을 왕창 퍼 먹이시던,
혜인이와 판이하게 통도 크시고 키도 훤칠 크시고 배우 뺨치게 미남인데다
당시 여수 주먹들을 평정하셨으면서도 고대를 졸업하신 큰 형님은
안타깝게도 20여 년 전 50대 초반의 나이에 일찍 타계하셨고
둘째 형님은 그 훨씬 전에 캐나다로 이민을 가 왕래나 연락이 끊기다시피 하였으며
서울 상대를 졸업하고 승종이와 산업은행 동료였던 막내인 동생과도
오래 전부터 소원한 사이가 되어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사실상 사고무친 상태라
부인 이외에는 가족이 없는 거나 다름없는 셈이 되었다.

아프고 나서 그래도 아직 대화가 가능하던 때,
‘종호야, 내가 너한테만 이야기하는데 와이프가 나에게 첫 여자였고 첫 사랑이었어.
소개도 받고 선도 본 여자가 여럿이지만 다 한 두 번 만나다 그만 뒀지 아니야.
지금 와이프가 나한테는 첫 여자이자 유일한 여자이고 처음 사랑한 여자이고
유일하게 사랑하는 여자야.‘

그 때 혜인이와 교우를 나눈 지난 50년 만에
혜인이가 여자는 물론이고 누구를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어 봤다.
성리학에 바탕을 둔 철저한 이성주의자인 혜인이에게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이 전혀 어울리지도 않았고 설사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자존심 상 절대 그런 말을 대 놓고 표현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 뜻밖이었다.
  
자기는 틈만 나면 마누라 핀잔주고 구박하지만
누가 자기 마누라 칭찬해주면 그렇게 좋아할 수 없다.
‘조 박사는 좋겠다.
젊고 예쁘고 똑똑한 마누라가 24시간 옆에 붙어서 먹여주고 씻어주고
오만 거 다 시중 들어주고. 늘그막에 마누라 잘 만나 호강하네.‘ 하면,

쑥스러운 듯이 흐흐 웃으며 ‘안 그래애’ 겸연쩍어 하지만
속으로는 좋아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 꼬리부터 올라가고 있다.

2년 반 전인 2016년 12월 말에야 혜인이의 정확한 병명을 알게 되었다.
혈관성 치매였다.
오래 전부터 조금씩 천천히 하지만 현재는 상당히 진전되었다는 게 담당의사의 진단이었다.
2016년에는 혜인이네와 자주 만날 기회가 많았다.
명절에 한성이네에서 모이기도 했고 재효가 귀국할 때마다 다들 같이 만나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혜인이는 이상한 점이라기보다도 기억력,
특히 단어나 사람 이름을 금방 잘 기억해내지 못 했다.
그러나 우리 나이에 다들 겪는 일이라 누구도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단지, ‘여수 천재, 조 헤인이도 세월에는 별 수 없구나.’ 정도였다.

혈관성 치매란 우리 뇌 세포에 연결 된 미세 혈관이 낡아 하나씩 터져
피 공급이 안 되는 세포가 기능을 상실하면서
그 세포가 관장하는 우리 몸의 기관의 기능 또한 상실하게 되는 병으로
현재로서는 뚜렷한 치료 방법이 없는 불치의 병이라고 한다.

병명을 알자 혜인이는 그 길로 학교로 가 사직서를 제출했다.
학교에서는 일 년만 있으면 정년이니까 그 때가지 병가를 내고 휴직을 하라며 만류했으나
강의도 못 하면서 그리고 나아질 수 없는 병인데
구차하게 그리고 학생들에게 욕 되게 그럴 수 없다며 사직해버렸다.

그리고 부인에게 재산을 정리해 반을 줄 테니 이혼하고 갈 길을 가라고 요구했다.
아직 창창한 부인에 대한 배려이자 진정한 사랑이었다.
부인이 절대 그럴 수 없다며 여하한 경우에도 평생을 함께 하겠다고 하자,
그러면 자기는 앞으로 절대 병원에 진료 받으러 가지 않을 것이고 약도 안 먹을 테니까
그대로 따라주고 대신 자신을 요양원에는 절대 보내지 말고
집에서 생을 마감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병원에서 받아온 한 보따리 약을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한다.
이후로 혜인이는 감기약도 먹지 않는다.
신장이 부실해져 소변보는데 심한 어려움을 겪어
부인과 내가 번갈아가며 우선 소변이라도 좀 시원하게 보라며 비뇨기과에 가 보자고
그렇게 간곡히 설득해도 움쩍도 하지 않았다.

지난 주 일요일인 26일에는 흥수, 용술이, 수영이와 백련 산 혜인이네를 다녀왔다.
지난 5월 11일 동기 소풍을 마치고 뒤풀이하며 약속한 바였다.
이후 수영이가 합류했다.
특히 용술이에 대해서는 혜인이가 대학 졸업 후 군대 복무를 마치고
미국의 아이비 명문 펜실베이니아 대학에 박사 과정 유학을 갔을 때
먼저 와 있던 용술이로부터 정착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절대 누구를 칭찬할 줄 모르는 혜인이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우리 한국사람 중에 용술이가 영어를 제일 잘 해.
미국 법정에서 한국인 통역해주는 아르바이트 할 정도야.‘
라며 입이 마르게 칭찬을 하곤 했었다.
2019.06.01. 송 종 호.




토요 살롱 264회 " 여수 밤바다 "
토요 살롱 262회 " Happy House "

Copyright 1999-2019 Zeroboard / skin by zero
서울고

 

   
 

제목 없음
   
   
 

HOME

동기회안내

동기사무실약도

졸업40주년기념회비납부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