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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호(2019-08-03 20:19:46, Hit : 11, Vote : 1
  토요 살롱 270회 " 羨 望 "

드디어 폭염의 시작이다.
동도 트기 전부터 매미가 온 숲을 다 점령한 듯 사방에서 악을 쓰며 자지러지게 울어댄다.

지난 주 수요일부터 찔끔거리며 내리기 시작한 비가 내리다 말다를 반복하며
그저께 오전까지 장장 일주일 이상을
구름이 교차하는 사이사이 어쩌다 잠깐 햇살이 스치듯이 반짝한 거 외에
시커먼 비구름이 덮은 하늘 아래 지속적으로 내리는 바람에
집안이 온통 꿉꿉하고 눅눅해져 별로 덥지도 않은데도 몸이 끈적끈적해
자기 전에 한 번 더 샤워를 해야만 했는데 그래도 기온은 그다지 올라가진 않아
창을 열고 창밖의 빗소리 들으며 선풍기 도움 없이 잠을 잘 수 있었다.

이렇게 열대야 없이 7월을 보낸 게 얼마만인지 기억에도 없다.
덕분에 말복이 열흘도 안 남았다.
이달 중순이 지나면 그래도 낮 더위야 여전하겠지만 열대야는 수그러드니까
잠 못 이루는 찜통더위도 앞으로 길어야 겨우 보름이다.
금년은 정말 수월하게 여름을 나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금년에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이 여름에 어디 물에 몸 한번 담글 기회가 없을 거 같다는 거다.
우리 동년배들은 다들 가족들과의 바캉스나 휴가지
차라리 집에서 시원하게 하고 혼자서 빈둥거릴망정
친구들이나 지인들과의 계획은 아예 생각 자체도 하지 않는다.

‘이 더운데 누구 만나는 거 자체가 귀찮어.’

하기야 이 폭염에 18세 낭랑 처녀라면 모를까 양귀비라도 귀찮은 판에
지랑 비슷하게 쭈그랑 백발 늙은 노인네 만나러 땀 찔찔 흘리며 혼잡한 전철에 부대끼고
뙤약볕에 나가 소주잔 깨작대며 잊지도 않고 맨 날 해대는
같은 이야기 같은 소리 떠들고 듣고 하며
결국은 무슨 소리 했는지 무슨 소리 들었는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 채
기운만 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다들 똑 같을 거 같다.

‘너희 둘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잖아. 요즘도 자주 만나?’

‘아니, 걔 본지 한참 됐어.
별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고 그냥 서로 연락 안하다보니까 몇 달 후딱 지나가데?“

몇 달 안 봐도 전혀 궁금하지가 않게 되어버린 거다.

악성 빈혈과 복수가 차 입원 치료를 받던 원철이가 여러 관련 치료를 받고
마지막 과정으로 지난 달 말 담석 제거 시술하고
수술 후 차고 있던 담즙 체외배출 호스도 며칠 전 제거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상처가 아무는 이달 중순이면 외출도 가능할 거라고 하며 그러느라 몸무게가 10kg나
빠졌는데 이제 겨우 2kg가 회복되었다고 한다.
빠지기 전에 원철이의 몸무게가 그 키에 60kg 겨우 넘어
걷는 게 휘청휘청 하게 보일 정도로 뼈에 가죽만 붙어있는 거 같았는데
거기에서 10kg가 더 빠졌었다니 얼마나 몰골이었을 거고
정작 본인은 얼마나 무기력하고 힘들었을까 안쓰럽지 않을 수가 없다.
치료 과정을 잘 버텨내고 이제 회복기에 들어간 원철이가
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기력을 완전히 회복해 곧 다가오는 시원한 가을에는
예전처럼 선글라스에 멋진 등산복 차림으로 어디 높은 산 정상을 정복하고
활짝 웃음을 머금고 의기양양하게 찍은 사진이 단체 톡 창에 다시 올라오기를 기대해 본다.

지난 해 11월 뇌하수체에 양성종양이 발견 돼 반년이 넘는 동안
수많은 검사와 진료를 받고 있는 충우도
초기 진단 후 8개월이 지난 얼마 전 종양의 활동이 더 이상 진행되고 있지는 않다는
희망적인 진단을 받아 수술을 하지 않고도 치료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져
그나마 천만다행으로 다소나마 안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충우가 무더위와 종양을 이겨내고 가을의 찬바람이 폭염을 몰아내는 거처럼
충우의 뇌하수체 속도 깨끗이 쓸어내 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지난 해 12월 방광을 들어내고 인공 방광으로 갈아 낀 기영이도 아직 회복 중에 있다.
그나마 인공방광과 연결할 여러 기관이 깨끗하고 건강해야 인공방광으로 대체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옆구리에 구멍을 뚫고 오줌통을 차고 다녀야 한단다.
다행히 기영이는 인공방광으로 갈 수 있었다.
기영이 말에 의하면 지난 해 혈루가 나오고 식욕도 없고 해서 동네 병원에 갔더니
별 대단한 거 아니라며 간단히 수술하면 된다고 해 그러려니 보다 하고
수술날짜까지 잡았으나
연대 의대에서 인턴을 마치고 군의관으로 복무 중이던 사위가 증상을 들어보고
빨리 연대 병원에서 정밀 검진을 받아야 된다며 서두르는 바람에 조기 발견을 해
성공적으로 수술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위가 군 당국의 허가를 받아 임시 근무지를 연대 병원으로 옮겨
장인을 극진히 보살폈다고 한다.
수술 후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고 기동할 만 할 때 문병 갔더니
직계가족이어서 일인 특실에서 특별대우를 받고 있었고
마침 병실에 들른 잘 생기고 예의바르고 싹싹한 사위와 인사를 나눌 수도 있었다.

얼마 전 형곤이가 자기가 한턱 쏴야 될 좋은 일이 있었다며
늘 다니던 소래 미순 네로 미순 네 단골 멤버인 나 외에
박 영철, 최 영식, 한 태수를 초대했다.
태수만 전철 시간을 잘못 계산해 약속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고
형곤이와 영식이는 거의 제 시간에 도착했다.
그런데 형곤이가 자리에 앉자마자 인사를 나누는 둥 마는 둥 몹시 아쉬운 표정을 지우며
영철이가 아침까지는 참석 확인을 했는데
오후 들며 몸 상태가 특히 속이 안 좋아 참석할 수 없게 되었다는
연락을 전철 타러 나오기 직전에  다시 받았다고 했다.

지난 4월 말에 우리 막내 일로 영철이와 통화를 하며 조만간 미순 네에서 보자고 했더니
다리 수술을 해 거동이 불편하니까 좀 나아지면 보자고 하며
아주 경쾌하게 별 일 아닌 거처럼 이야기해 어디 가볍게 골절상이라도 입었나하고
나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그러고 얼마 안 된 5월 11일 동기 봄 야유회 참석자 명단에 있어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거나
‘다소 불편하더라도 동기 회장이니까 무리를 해서라도 참석하려는가 보다.’
했는데 정작 참석은 못해,
‘아직 나다닐 정도로 회복되지는 못했는가 보네. 의사니까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했고
지금쯤 다 회복했나 어쨌나 전화를 해 볼까 어쩔까 하는 사이에
지난 달 중순 모친상 부고를 받고 문상을 가 보니까 멀쩡하게 다니며 손님 접대를 해
‘아, 이제 다 나았나 보다. 어차피 월 말에 미순 네에서 다들 같이 보기로 했으니까
그 때 만나 회포를 풀면 되겠지.‘ 했는데
이 번에는 다리가 아니라 엉뚱한 데가 불편해 참석을 못하게 되고 말았다.
서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어제 걱정이 돼 전화를 했다.
목소리가 70을 바라보는 노인답지 않게 여전히 굴러가듯이 경쾌하고 짱짱하다.
영철이 목소리에는 언제나 웃음기가 섞인 즐거운 가락이 있어
듣는 사람도 덩달아 마음이 가벼워진다.

“미안해 못 가서. 속이 안 좋아 가서 회를 먹으면 다 토 할 거 같더라구.
다들 만나서 재미있었어? 형곤이가 2차로 노래방까지 쏜다고 했는데 갔었어?”

“박 교수가 없는데 뭐가 그리 재미있었겠어?
그리고 가수가 안 왔는데 우리끼리 무슨 노래방을 어떻게 가?”

“하하, 그랬구나. 그러고 보니 노래방 가 본지 오래 됐네.
그런데, 네 둘째는 학기 시작했어?”

“9월에 시작이지. 우리 애가 아빠하고 친구 관계를 떠나
박 교수를 자기 멘토로  모시는 거 같던데?
신상 변화가 있으면 아빠보다 먼저 연락하고.
스승이기도 한데다 같은 길을 가는 인생의 대선배라 그런가 봐.“

“하하, 나도 녀석이 기특해 앞으로 가는 길을 쭉 지켜보고 싶어.
지가 가는 길을 정해 놓고 하나씩 단계를 밟아가는 게 대견한 거지.”

“그런데 형곤이한테 들었는데 건강이 안 좋다며? 걱정돼서 말이야.”

“아니 뭐,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야. 의사 말 잘 듣고 치료 잘 받고 있어.
조금씩 좋아지고 있어. 내가 의사인데 말이야, 이거 체면이 말이 아니네. 하하. “

“빨리 회복해서 가을에는 미순 네에서 다시 만나. 이 번에는 내가 쏠 차례야.‘

나하고 고2,3 이년간 같은 반이었고 대학도 성대 상대를 같이 다녔고
심지어 첫 직장이던 제세산업까지 같이 다녀 거의 평생을 함께 한
우리 평가옥 모임의 기둥 승헌이도 얼마 전 폐기종 진단을 받고
드디어 나하고의 연륜보다 더 오랜 세월 동무가 되었던 담배를 끊었다.

몇 년 전, 딴에는 충고를 한답시고 담배를 끊으라고 했다가 혼난 적이 있었다.

“송 종호, 야 임마, 니가 내 친구 맞냐.
담배가 나한테 유일한 낙이자 취미인데 이거 관두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정색을 하고 화를 벌컥 내는 바람에 ‘다시는 담배 끊으라는 이야기 안 할게.’
싹싹 빌고 꼬리를 잔뜩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의료에 전문지식이 없어 폐기종이 어떤 병이고 어떤 증세인지는 모르지만
불편은 할지 몰라도 최소한 못 고치는 병은 아닌 거 같다.
잘 관리하고 잘 조리해서 조속 완쾌하길 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 건강하고 신선한 이야기도 있다.
포항에 위치한 한동 대에서 기계제어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퇴임한 배 건웅이
이달 말 선교하러 5년 기한으로 아프리카 탄자니아로 떠난다고 한다.
이미 혼자서 미리 사전 답사 여행을 다녀왔다고 하고 부부가 같이 떠난다고 한다.

부인과 같이 가기 위해 사전 공작을 했다지만 기후고 환경이고 생활이고
너무나 불편한 그 오지에 남편이 혼자서 며칠 여행 다녀온다고 하더라도
왜 하필이면 풍토병에 걸릴지도 모르고 안전하지도 않은 아프리카에 가느냐고 말릴 법하고
여행을 같이 다녀오자고 하더라도 모처럼 가는 여행을 훨씬 더 가보고 싶은 데도 많은데
왜 그런 오지로  가느냐고 강력히 이의를 제기하거나 최소한 한번쯤은 망설일 텐데
나머지 인생을 봉사하러 간다는데 선 듯 따라나선 부인의 결단이 많은 걸 시사해 준다.

왜냐하면 주변의 지인들 중에 노후를 대비한답시고 호기롭게 시골에 별장 같은 걸 구입하거나
짓거나 했지만 마누라가 절대 오려고 하지 않아 거의 빈집으로 내 팽겨 쳐 둔 경우를
여럿 봤기 때문이다.
자기가 누리고 있는 생활이나 환경에서 벗어나는 걸 싫어 해
서울에서 기껏 두어 시간 거리인데도  마누라가 따라나서기는커녕
한번 들여다보지도 않는 경우가 보통이다.
공기 좋고 물 좋은 시골에 터를 잡으려다가 아예 처음부터 원천봉쇄 당하는 경우도 봤다.

정년 후 봉사하며 여생을 보내려면 훨씬 편하고 여유롭게 할 수도 있다.
다니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봉사를 할 수도 있고
집에서 출 퇴근하며 그리고 자신이 누리고 있는 생활을 포기하지 않고
열악한 환경에 처한 장애인과 사회 최 저층 후미진 곳을 찾아다니며
봉사 활동으로 보람을 찾을 수도 있다.

손자를 보고 나서 인생이 바뀌었다며 손자 보는 낙으로 산다고들 하는데
그런 재미, 여기서의 안락하고 편리한 생활 다 내려놓고, 가진 거 다 버리고
겨우 답사 차 한 번 가 본적 밖에 없는
아는 사람이라고는 기 정착한 선교사 몇 분밖에 없는 머나먼 아프리카 오지로
힘이 펄펄 넘치는 청장년도 아니고 정년퇴임을 하고
이제 나머지 인생을 좀 편히 쉬어도 될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의 노인이 되어
부인과 함께 선교하러 떠난다고 한다.

알다시피 한동 대는 교직원이나 학생들 대다수가 기독교인들이다.
잘은 모르지만 내가 다니는 온 누리 교회와도 깊은 연관이 있어 온 누리 교회 담임 목사가
현 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기독교 재단이 운영하는 기독교 학원이라고 보면 될 거 같다.

탄자니아는 머나 먼 아프리카 동안의 남쪽에 위치한 국가다.
사파리도 있고 킬리만자로도 있고 빅토리아 호수의 남쪽을 둘러싸고 있어
관광자원이 풍부하고 자연경관이 아름다울 거로 연상 되지만
그건 며칠 관광 갔을 때 이야기다.
풍토병도 있고 모기등 물 것 천지고 문화, 오락 등 여가거리가 빈약하고
사시사철 뙤약볕에 우리가 가서 살기에는 생활환경이 너무나 천박한 빈한한 나라다.

40년 전인 1979년 탄자니아와 남쪽과 서쪽을 경계로 하고
탄자니아의 바로 북쪽에 위치한 케냐에 갈 때만 해도
직항은 물론이고 west bound 항로가 개발되지 않아 우선 동경에서 갈아타고
앵커리지에 잠시 기착하여 급유한 후 파리나 런던에 내려 다시 카이로 행으로 갈아탄 후
카이로에서 또 비행기를 바꿔 타야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행기만 장장 2박3일을 타 나이로비 공항에 내리니까 발이 퉁퉁 부어
신발이 들어가지 않아 뒤축을 꺾어 신어야 했고
내 딛는 데 힘을 줄 수 없을 정도로 무릎에 힘이 다 풀려 다리가 후들거리기까지 했었다.
지금은 나이로비로 일주일에 몇 번 직항이 운행한다니까 나이로비에서 갈아타든지
두바이에서 갈아타든지 카이로에서 갈아타든지 한번만 갈아타면 되겠지만
그래도 transit 하며 lay-over 하는 시간을 고려하면 하루 이빠이는 잡아야 할 거다.
탄자니아의 수도 다루에살렘에서도 목적지까지
아마 최소 몇 시간은 시골길을 달려야 될 거로 짐작 된다.
그래서 일단 가서 정착하면 들락거리기가 쉽지가 않을 거로 보인다.

탄자니아에 먼저 정착한 한국인 선교사들이 현지에 무슨 공과대학 같은 걸 세웠는데
거기에서 아이들도 가르칠 겸 선교활동도 하러 간다고 했다.
현지에서 학교를 운영하자면 선교를 떠나 우선 가르칠 교수도,
각 파트별 전문 인력도 턱 없이 부족할 텐데
우리 배 건웅 교수처럼 전문성을 갖춘 교수가 자발적으로 선교사로 오겠다니
아마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은 감동이었을 거다.

“처음 가려고 마음먹었을 때는 탄자니아에 미국의 MIT 같은 최우수 공대를 만들어야겠다는
포부가 있었으나 선교사 훈련을 받으며 그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내가 거기 가서 할 일은 인재를 키우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알게 하고 예수님의 제자를 배출하는 거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5년 임기로 가지만 5년 채운 후에도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중병이 걸려 거기서는 치료가 되지 않으니 귀국해야 된다고 할 때까지  
선교하며 탄자니아에 살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나도 어디론가 가야 할 텐데 나는 왜 못 가고 있는 거지?
당장 떠나지는 못하더라도 뭔가는 해야 할 텐데 왜 못하고 있지?’

인생을 바꾸게 하는 손자도 없는데 그리고 아직 어디 불편한 데 없고 사지육신이 멀쩡한데
우물쭈물하고 있는 자신의 옹졸함이 부끄럽고
건웅이의 결단과 용기, 남편 따라 나서는 부인의 순종이 너무나 부럽다.
2019.08.04. 송 종 호.




토요 살롱 271회 " 쉼 터 "
토요 살롱 269회 " 配 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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