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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호(2019-08-17 21:17:43, Hit : 13, Vote : 1
  토요 살롱 272회 " 그 늘 "

대구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서울로 진학한 소년, 소녀들이
입학식을 하자마자 수소문하여 모여 이름 하여 경구 회라는 문학 서클을 결성하고
처음 만난 지 금년이 50년이 되는 해다. 1969년, 우리가 고1때다.
반세기가 지나 어느 듯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고
까까머리는 백발이 되고 단발머리는 파마머리가 되었지만
누구야 하고 이름을 불러 보는 거만으로도
50년 전의 수줍던 시절을 회상하게 되어 저절로 웃음이 떠오른다.
그러고는 50년 전의 모습, 그 때의 장면들과 겹쳐지게 된다.

그 중 한 친구는 거의 매년 여름이 시작할 무렵이면
한 달 내지 한 달 반 일정으로 장거리 해외여행을 다녀온다.
떠나기 몇 달 전부터 우선 행선지를 정하고 거기에 맞는 스케줄을 짜고 동행을 구하고 하며
노심초사, 안달하며 긴장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여
모든 일이 잘 될 테니까 푹 안심하고 잘 놀고 무조건 즐기고 잘 다녀오라고 격려를 하지만
내심 돌아올 때까지 먼 곳에서 혹시나 무슨 일은 없는지 은근히 걱정도 하곤 하는데
막상 돌아와서 여행지를 다니며 즐겁고 재미있었던 일은
평소에도 맑고 초롱초롱한 눈을 더 반짝이며 입 꼬리에 웃음을 잔뜩 머금고
그리고 위기의 순간들을 벗어나며 아찔했던 순간들은 눈살을 모으고 살짝 몸서리를 치며
아직도 여행의 흥분 상태 그대로 신나게 이야기 할 때면
나도 마음속으로는 그 여행지를 함께 따라다니며
그 경험에 동참하고 그 기분을 조금이나마 공유하려고 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들떠서 웃다가 기억을 더듬으러 미간을 찌푸리기도 하며
이야기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50년의 세월을 훌쩍 뒤로 뛰어넘어 50년 전의 모습이 겹쳐지고 있다.  
50년의 세월을 수시로 들락거리며 이야기 할 수 있고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그야말로 쉼터처럼 소중한 친구다.

우리나라 40대 남자들의 시청 율 1위라는 ‘자연에 산다.’ 라는 TV 프로가 있다.
이런 저런 연유로 속세를 떠나 산 속에 깊이 묻혀 혼자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산에서의 일상생활을 소개하는 프로다.

인생에서 가장 바쁘고 활발하게 사회생활을 해야 하고
사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역할도 책임도 가장 막중하고
그런 역동적인 생활이 가장 큰 보람이자 즐거움이 되기도 하는 인생의 정점에서
최고의 황금시기를 보내고 있는 40대들에게
세상과 등지고 나 홀로 산에 묻혀 사는 사람들 이야기가
어떻게 시청 율 1위가 될 정도로 흥미를 끄는지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40대들에게 주어진 책무가 과하고
눈 뜨면서부터 부대끼고 치여야 하는 인간관계에 피로가 쌓였는데
어디 마땅히 쉴 곳도 잠시 뙤약볕을 피 할 수 있는 그늘조차 찾지 못해
가족이고 뭐고 세상과 단절하고 어디론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고 싶을 정도로
현실이 각박하다는 이야기일까.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막연한 동경이고 생각뿐이지
40대고 50대고 60대고 연령대에 관계없이
인간이란 건 아직도 사지육신이 멀쩡하고 살날이 많이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막상 그렇게 다 팽개치고 훌쩍 어디 산 속에 묻히기가 쉽지 않은 동물이다.
인간은 우리가 익히 배워 알고 있듯이 무리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사회적 동물이다.
즉 무리에서 벗어나면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되는 7가지 치명적인 죄, 즉,
교만, 시기, 분노, 태만, 허영, 탐욕, 욕정도 접하는 대상이 있고 무리 속에 있기 때문에
발생되는 것들이지 어디 혼자 격리되거나 무리와의 관계가 차단되고
다시는 무리 속에 섞일 일이 없게 되면
그런 죄의 근원이 되는 복잡하고 지저분한 본성 같은 건
아예 씨앗조차 뿌려지지도 않을 것이다.

죄는 어떤 특정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피해를 주고 고통을 주고 불편을 야기하는 거다.
어디 혼자 떨어져 다른 인간을 접하지 않으면 죄를 저지를 대상이 없어진다.
그러니까 인간이 무리를 지어 사는 동물이기 때문에 무리 속에 사는 한
죄의 근원이 되는 7가지 본성이 자연 뽕으로 태동하여
누구의 보살핌이나 관리가 없더라도 스스로 알아서 아주 건강히 무럭무럭 잘 자란다.

이렇게 인간은 7가지 죄의 근원이 되는 본성을 잉태하고 태어나 여생을 함께 하기 때문에
society에서 community의 일원으로 속해 있는 한
누군가를 반드시 불편하게 하거나 고통을 주거나 피해를 입히며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없게 되어 있다는 거다.

간단히 예를 들자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떤 자리, 어떤 모임, 어떤 만남에서도
자신을 들어내고 싶어 하고 자기주장을 관철하고 싶어 하고 자신을 자랑하고 싶어 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고 누군가를 무시하고 깔아 뭉기고 망신주고 싶어 한다.
몇 가지 중복되는 죄를 하루에도 수도 없이 일상적으로 범하고 있는 거다.

그것도 음심을 품는 거만으로도 죄가 된다는 욕정을 제외하고서다.
‘욕정은 나이가 많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고 여자라고 없는 게 아닙니다.
타고 난 인간의 본성이고 제어가 안 되고 절제도 어렵습니다.
현장에서 무조건 도망가야 됩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됩니다.‘
어느 목사님 말씀이다.
그런데 눈에 띄는 게 이성이고 TV를 틀면 이성인데 어디로 도망을 갈 데가 없다.
그리고 그거 때문에 회개를 해야 한다면 종일 회개하고 있어도 모자란다.

그런데 죄는 상대적이다.
사회적 규약에 의해 상대방의 의사와 관계없이
들어난 행위에 대한 처벌 규정을 정한 경우를 제외하면
상대방이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전혀 괴롭지 않았다고 하고 절대 불편하지 않았다고 하면 죄가 성립될 수 없다.

교만이 자기 소신에 충실한 박력으로 보여 질 수도 있고
시기심이 승부 근성으로 둔갑될 수도 있고
분노가 격정적이고 솔직한 성격으로 그럴듯하게 보여 질 수도 있다.
태만은 여유와 느긋함으로,
자기중심적이며 끊임없이 자신을 과장하고 자랑하고자 하는 허영은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으로 비춰질 수도 있고 탐욕은 성취욕으로 미화되고
욕정은 사랑으로 승화될 수도 있다.

인간의 행불행의 감정도 무리 속에서 인간이 본래 가지고 태어난 이런 본성에 의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상대방과 비교하고 견주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고 있다.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금방 들어내야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고 우선 억제 먼저하고 주변부터 살피는 사람과 표현의 차이가 있겠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내심 이렇게 변덕이 죽 끓듯이 하며
순간순간 행불행이 교차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거다.

이런 관점에서 조울증은 심해지면 병이지만.
다소간의 조울증은 인간이라면 다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증상이라고 해도 될 거 같다.

며칠 전 단체 톡 창에 진규가 홍 수희 시인의 ‘그늘 만들기’ 란 제목의 아주 예쁜 시를 올려
잠시 공유해보고자 한다.

‘그늘 만들기’
                  홍 수 희
8월의 땡볕
아래에 서면
내가 가진 그믈이
너무 작았네.

손바닥 하나로
하늘 가리고
애써 이글대는
태양을 보면
홀로 선 내 그림자
너무 작았네.

벗이여,
이리 오세요.
홀로 선 채
이 세상 슬픔이
지워지나요.

나뭇잎과 나뭇잎이
손잡고 한 여름
감미로운 그늘을
만들어 가듯
우리도 손 깎지를
끼워 봅시다.

네 근심이
나의 근심이 되고
네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때

벗이여,
우리도 서로의
그늘 아래 쉬어 갑시다.

우리가 사회의 일원으로 살면서 어떤 관계로 만나게 되던지
누구와도 상호 일곱 가지 인간의 본성 중 몇 가지는 서로 간에 들어내게 되어 있다.
그걸 얼마만큼 쌍방 인정하고 받아 들이냐에 따라 친하게도 되고 멀어지게도 된다.
친하게 되면 서로 그늘도 되고 쉼터도 될 수 있을 거다.

‘자연에 산다.’ 프로의 진행자가 소위 자연인과 생활하며 반드시 물어보는 말이 있다.
‘외롭지 않으세요?’
물론 대답은 한결 같다.
‘하늘, 별, 바람, 산, 나무, 새들, 산 짐승들, 눈앞에 펼쳐진 자연이 모두 벗인데
뭐가 외롭냐. 오히려 속세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 때가 외로웠다.‘
뭐, 그럴 수도 있을 거다.

그러나 이렇게 산으로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사는 사람들은 극소수다.
그게 그렇게 좋다면 우리나라 산이란 산은 온통 오두막, 움막, 컨테이너로 미어터질 거고
대도시의 집들은 텅텅 비고 값도 폭락하여 도시의 무주택자들 집 값 걱정을 안 해도 될 거다.
자연을 벗 삼을 수 있는 산림, 어촌, 농촌은 최근 들어 귀농이 늘어나느니 어쩌니 하지만
여전히 인구가 점점 갈수록 희박해지고 있고
여전히 농어촌을 떠나 복작대는 도시로 몰려드는 인구가 더 많다.
그리고 40대 남성의 최고 인기 프로라지만 실지로 40대가 어느 날 몽땅 팽개치고
산으로 도망가 버리는 경우는 거의 없는 거 같다.
자신은 그렇게 외롭게 살기 싫은 거다.

이와 같이 인간은 어차피 더불어 살아야 한다.
거기에 즐거움이 있고 거기에서 행복도 찾고 보람도 찾게 된다.
하지만 대체로 사람을 만나 흔쾌해지기가 쉽지 않다.
만난 걸 후회하는 경우가 더 많다.

자기 말만 하고 자기주장만 하고 어떻게든 가르치려들고 훈계하려고 하고
어디서 주워들은 일방적인 견해로 중무장하여
그와 방향이 다르거나 대립되는 의견을 무조건 무시하고 비판하려고 하는 인간을 만나면
그 불쾌한 기분이 며칠은 간다.
한 대 패 주지 않고 온 걸 후회하게 된다.
뿐만 아니다.
어떻게든 비위를 긁어 기분을 상하게 하는데 천부적으로 타고난 인간들도 있다.

그러나 ‘저런 인간을 내가 왜 만났지?’ 하면서도
사회적으로 얽힌 불가피한 인연이나 관계로
또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할 수 없이 또 만나게 된다.
그리고 가만히 돌이켜보면 그 인간이나 나나 한 짓거리가 별 차이도 없다.
그 인간도 아마 똑 같은 이유로 불쾌해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흔치 않은 경우지만 만나면 너무나 자연스럽고 편안해
만남을 학수고대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만남이 바로 쉼터가 되고 그늘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지치고 힘들어 쉬어야 할 쉼터와 그늘이 필요할 때
속세와 인간관계를 벗어나 자연으로 떠날 수도 있겠지만
자기와 가까운 사람에게서도 찾을 수가 있다.
그리고 그게 훨씬 쉽고 빠르고 효과적일 수 있다.

자연에서는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겠지만 웃음이 없다.
자연이 위안이 될 수는 있겠지만 행복을 줄 수는 없다.
자연에서 안도할 수는 있겠지만 즐거울 수는 없다.
자연에서 감탄을 할 수는 있겠지만 감동은 없다.
이런 건 모두 인간관계에서만 가능한 감정들이다.
그래서 나에게 쉼터가 될 수 있고 그늘이 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거다.

나에게 그늘이 되어주는 사람, 나에게 쉼터가 되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마음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위안이 되고 근심이 사라지고
자신도 모르게 슬며시 웃음을 짓게 된다. 잠시나마 행복감에 젓게 되는 거다.
나에게 그런 사람이 있으려면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나도 땀을 씻어 줄 그늘이 될 수 있고
지친 몸을 쉬게 해 줄 쉼터가 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에 일방적인 관계는 있을 수가 없다.
내가 그럴 마음이 전혀 없는데 누가 나에게 그렇게 베풀어 줄 리가 없다.
그러려면 어느 정도는 일곱 가지 인간의 본성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가장 적합한 말이 바로 사랑이다.
누구에게 사랑을 받으려면 자기가 먼저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랑하는 마음은 바로 배려이다.
상대방의 감정으로 이입하여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주어야 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
인간은 원래 사랑이라는 걸 할 줄 모르게 태어난다는 거다.
그래서 후천적으로 서로 더불어 살아가면서 스스로 씨를 뿌려 스스로 가꾸어야 된다.
누가 가르쳐 줄 수도 없는 거고 공부해서 되는 거도 아닌데다
뿌리가 없어 생명력이 약하기 때문에 잠시 한눈 팔다보면 어느새 시들어버린다.
어쩌면 인간에게 해야만 된다고 요구하는 것 중 가장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역설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죄의 근원인 인간의 7가지 본성을 억제할 수 있어야만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길 수 있다.
교만에 가득 차 있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분노하고 게을러 터져서 뭐 해주기만 바라고
자신을 자랑하고 싶어 안달하고 소설처럼 과장하고 싶어 하는 허영에 들떠 있고
아귀같이 탐욕을 추구하고 여자를 섹스 대상으로만 여기는 정욕에 사로잡혀 있어서는
누구를 사랑할 수 없다.

그런 주제에 누가 자기를 사랑해 줘 자기의 그늘이 되고 쉼터가 되어 달라고 한다면
너무나 뻔뻔스럽고 염치없는 인간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기야 너나 할 거 없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다 염치없고 뻔뻔스럽다.
그게 인간이다.

그러나 70을 바라보는 이 나이가 되도록 이때까지 대체로 누구 보다는 나를 중심으로
몰염치하고 뻔뻔스럽게 살아왔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여생동안이라도
누구의 쉼터가 되고 그늘이 되어 보려고 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고 보람도 되고 이제까지 살아온 바와 전혀 다른 그런 데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2019.08.17. 송 종 호.






토요 살롱 273회 " 어슬픈 피에로 "
토요 살롱 271회 " 쉼 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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