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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호(2020-02-08 20:45:05, Hit : 148, Vote : 12
  토요 살롱 288회 " 錯 覺 "

공교롭게도 입춘전날부터 기온이 급강하해 입춘 다음날과 그 다음날은
올 들어 처음으로 이틀 연속 최하기온이 영하 10도를 밑돈 데다
뺨을 따갑도록 시리게 하는 한기 가득 서린 바람까지 불어
체감 온도는 거의 마이너스 20도를 육박하는 등 주간 내내 영하권에 머물며
올 들어 가장 추운 한주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내일도 영하의 날씨가 예보되어 있지만 다음 주는 주초부터 날씨가 확 풀려
수요일, 목요일 이틀간 비 예보도 있는 등 한 주내내 영상의 날씨라고 한다.

주중에 비까지 내리며 포근한 날씨가 예보된 다음 주가 지나면
2월도 반이 어영부영 지나가게 되고 그러다보면 이내 3월이다.
3월 꽃샘추위가 아무리 맹위를 떨쳐도 삭풍한파가 며칠이고 계속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금년 추위도 이번 주가 고비가 될 거라는 이야기고
겨울도 끝 무렵에 접어들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돌아보고 자시고 할 거도 없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너무나 짧은 겨울이었다.
크리스마스다 연말이다 연초다 어쩌며 어어 하다 보니 바로 설이 닥치고
설 연휴 후 이어진 봄 날씨 속에 또 다시 복 나누는 인사하고 다니며
뭔가 움직이려 며칠 워밍업을 한 다음 주인 이번 주 겨우 며칠 추웠는데
빙판이고 얼음이고 얼 겨를도 없이 눈 한 송이 구경도 못하고 겨울이 마무리되고 말거 같다.
그렇다고 뭐 강추위가 아쉽다거나 빙판길이 그립다거나 하는 거는 아니다.

겨울이 겨울을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휙 지나가버리려고 하는 것이
그만큼 흐르는 세월이 빠른 거 같고 그렇게 가속이 붙은 세월 속에
꼭 붙들고 있어야 할 거 같은 그리고 한번 놓치면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 거 같은 뭔가도
한번 빠지면 다시는 되돌아 올 수 없는 늪 같은 망각 속으로 같이 빨려 들어 간 거 같아
그게 너무 아깝고 너무 속상하고 너무 아쉬운 거다.

가족들이 미국으로 이주한 후로는 혼자서 설에 차례를 지내기가 뭐해
섣달 그믐날 안창으로 가서 조카들과 삼겹살 굽고 큰 조카가 미리 마련한 부치게 안주 삼아
밤 이슥할 때까지 원주 향토 브랜드인 치악산 막걸리를 화장실에 뻔질나게 드나들도록
질펀하게 마시다 술상을 물리고도 TV를 틀어 놓은 채 빙 둘러 앉아
아주 옛날이야기부터 연대를 넘나들며 중구난방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풍습에 따라 자정이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곤 한다.  

“ 숙모님은 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아흔 넘은 노인인데도 최고소득 노인이겠네요?
  경로당에서 다들 부러워하겠어요?“

“ 야, 그런 말 말어. 나 경로당에 안가. 늙은이들이 종일 쓰잘 데 없는 말만 떠들어대고
  고스톱이나 치고 그 꼴 보기 싫어 안가.“

숙모보다 한 살 위인 숙부가 지지난 해 타계하고 나서 6.25참전 부상 용사로 받던
유공자 연금을 물려받았다.
큰 아들은 중풍으로 쓰러져 요양병원 신세인지가 8년이나 되고
직장 생활을 하다 그만두고 추진하던 사업이 망해
두 딸을 두고 경제적인 이유로 10여 년 전 이혼한 작은 아들도 집 한 칸커녕 빈 털털이로
뚜렷한 생계수단이 없이 일당 쟁이 공사판을 전전하고 있고  
하나 있는 딸은 진작에 일본으로 시집가 일본 국적을 취득한 지 오래됐으나
수년전 일본인 사위가 급사하는 바람에 딸도 일본에서 생활이 넉넉지가 않고
청량리 13평 아파트는 3년 전에 결혼한 작은 손자 명의이고,  
안창 양철지붕 오막살이 시골집은 아직 총각인 큰손자 명의로 되어있어
손자들에 얹혀사는 형편이라 기초 수급자에 뭐에 이런저런 연금을 합하면
시골에서 노인 혼자 쓰기에는 꽤 되는 금액이다.
거기다 쌀 , 마늘, 배추 등 때에 따라 무상 지원하는 생필품도 다양하고
면사무소에서 전등도 무상으로 달아 주고 뭐 이것저것 공짜로 해 주는 거도 많다.

“ 이번 김장하는데 100만원이나 들었어. 새우젓이 왜 그렇게 비싸?
  젓 값만 20만원이 넘게 들었지 뭐야.
  우리는 젓갈을 그렇게 쓰지 않는데 영근이 이모들이 김장 담가준다고  내려와서
  젓갈에 양념에 양념은 또 얼마나 재워 넣는지 고춧가루 범벅이라 나는 매워서 먹지도 못해.
  너 준다고 두 통 따로 담아놨으니 가져가.
  그리고 땔감 나무 한차 들여놨는데 한 차에 60만원이야.
  그거 내가 냈지 집전기 세 내가 내고 병원비 약 값 내고.
  그래도 모자라지는 않아, 하하.
  영감이 살아생전에 그렇게 무심하더니 죽어서 그래도 좀 보태주지 뭐야. “

하하 하고 입은 웃고 있지만 눈 깜빡임이 빨라지며 양 눈가에 맺히는 물기를
연신 검지손가락 끝으로 훔치고 있었다.
영감 이야기가 나오니까 오만 감회가 다 교차하는지.

숙모님은 조선 조 선조 후비인 영창대군 생모 인목대비 부친인 김 제남 대감부터 이어온
연안김씨 종가 집 딸이다.
지금도 사당과 가옥은 지방 문화재로 지정되어 함부로 손을 못 댄다.
안창 일대 거의가 폐위됐다 인조반정으로 복원 된 후 하사 받은
연안 김 씨 종가 소유의 토지, 임야, 산이었지만 대를 물려 내려오며 다 팔아 먹고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숙모님 큰 손자가 찻길에서 차 한 대 겨우 다닐 수 있는 오른쪽은 바로 논과 접하고
왼쪽으로 야트막한 비탈아래 띄엄띄엄 낡은 농가가 서 있는 농로로 200-300m 들어가
그 농로에서도 왼쪽으로 10여m 더 쑥 들어가 눈에 잘 띄지도 않게 50평 남짓 대지에
20여 평 건평의 다 쓰러져 가는 나지막한 양철 지붕 오막살이 한 채 나마 겨우 물려받았다.

그래도 손바닥만 한 마당에 평상도 있고 삼겹살 바비큐 할 숯불 피울 공간도 있고
밤나무와 대추나무 사이 몇 발자국 되지도 않지만 채소를 가꿀 수 있는 텃밭도 있다.
숙모님 조카가 종손인데 미국 유학 중 미국 여인과 결혼하고 슬하에 딸만 셋이라
김 제남 대감으로부터 내려온 대도 끊겨버렸다.

반면 우리 숙부는 서울 상대를 나온 강원도 수재였는데
60년대 초반 한창 사회활동 왕성하던 나이에 이화여대 출신 신여성과 연분이 나
승승장구하던 직장을 떠나고 가정을 버리고 호적까지 새로 만들어 잠적해버렸다.

아이 셋을 낳고 30대 초반에 소박을 맞은 숙모님은 서방이 새 여자 얻어
조강지처와 자식들을 버렸는데도 시부모 모시고 친정의 도움으로 근근이 끼니 이어가며
아이들 키우다 시 부모님들이 다 돌아가시고 아이들이 성장하고 출가하자
친정인 안창으로 내려 와 지금의 오막살이에 정착하셨다.
숙부가 돌아가신 줄도 모르고 있다가 지지난해 화장한 기록이
숙부 거주지였던 경기도 어디 관청으로 넘어와 거기서 사망신고를 하라고 연락이 와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숙모님은 소박 받고 혼자서 친정으로부터 온갖 미운 눈총 받아가며 얼마간 얻어온 양식으로
시부모 모시고 아이들 돌 본 지난 60년 세월 동안 단 한 순간도 숙부님 원망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언제 불시에 숙부가 들이닥칠까 봐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몸을 정갈하게 가꾸었다고 한다.

10여 년 전 숙모님 장남이 뇌일혈로 쓰러지기 전 어떤 경로를 통했는지
숙부가 동생과 연락이 닿아 몰래 안창에 내려와 부자간에 만나기도 하고 밥도 같이 먹고
전화 통화도 자주하며 안부도 주고받고 그러다
마음 약한 동생이 비록 아버지가 자기들을 버려 어려서부터 지지리 고생을 했지만
연로하고 쇠약해져 자식이라고 찾아온 아버지의 모습을 보자 그래도 핏줄이 댕겼는지
‘형이 한 번 우리 아버지 만나 보라’ 며 아버지를 모시고 오겠다고 완강히 고집하여
그럴 때마다.

‘최고 대학에서 최고 교육을 받은 주제에  그렇게 파렴치하고 지밖에 모르는 인간이
일가는 고사하고 같은 성씨라는 거조차 부끄럽다.
자기가 조강지처와 어린 자식들을 버리고 바람나 호의호식하다 뭔가 뉘우친 게 있다면
우선 자기 땜에 자기 부모까지 모시게 하며 생으로 청상과부 만든 자기 마누라부터 찾아 와
무릎 꿇고 속죄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해야지
자식 주위 빙빙 돌며 동정심이나 유발해 뭐 어떻게 해보려는  태도 자체가
비열하기 짝이 없이 얄팍한 게 진정성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일고의 가치도 없는 못 되어 먹은 인간임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우리 집안이 대를 이어가며 불행이 겹쳐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어 비록 보잘 것 없지만
스스로 호적을 파가고 여태 뒤도 돌아보지 않다가 돈 떨어지고 초라해져
오도 갈 데 없어지니까 늙고 병든 몸 어디 의탁해보려고 기웃거리는 꼴 보기도 싫고  
앞으로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우리 집안에 절대 다시 발 들여 놓아서는 안 된다. ‘

펄쩍 뛰며 온갖 욕설과 비난을 다 퍼부어도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한 켠에 계셨지
한 번도 자기 신세 한탄하지 않았고 내말이나 분위기에 동조하지도 않았었다.
돌이켜 보면 오히려 한 번씩 슬쩍 나를 바라보는 눈길에
약간의 원망 같은 섭섭함이 섞여있었던 거 같다.

“그렇게 죽을 걸 가지고.”

넋두리처럼 나지막이 내뱉는 한숨 섞인 중얼거림에 원망보다는 짙은 여한이 담겨있었다.
무슨 미련이 남아있었을까.
어느 날 갑자기 대문을 열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불쑥 마당을 들어서는
서방님의 환상을 마음에만 담아둔 채 얼굴 한번 못 본 그리움일까.
조강지처로서 꿈에도 그리던 서방님을 자기 손으로 마지막 가는 길을 수습하지도 못하고
제대로 배웅도 못 한 아쉬움일까.

지난해 연말을 불과 며칠 앞두고 구우 회 용일이한테서 송년 모임 하자는 톡이 왔다.
토요 살롱에 몇 번 소개한 바와 같이  용일이는 서울 중 23회로 고등학교는 대광을 나왔지만
우리 동기들과 스스럼없이 지낼 뿐만 아니라
자기 외에는 모두 우리 동기인 구우 회를 오랫동안 이끌고 있다.

말이 구우 회지 내가 참석한 이후로 9명이 모두 모인 예가 없다.
이 번에도 대구에서 남철이가 올라오고
뇌하수체 종양으로 주기적으로 검진을 받고 있는 충우가 참석했는데도
5년 전 기적적으로 종합검진 받다 우연히 아주 초기에 발견한 췌장암 수술을 하고
이제는 거의 완치 판정을 받을 때가 된 원철이, 여전히 만년 청년인 희권이,
이렇게 겨우 다섯 명이 구우 회 단골 모임 장소인 명동의 유서 깊은 중식당에서
자리를 같이 했다.

술들이 예전 같지 못하다보니까 자리도 일찍 파하게 된다.
일찌감치 시작했지만 계산을 하며 시계를 보니까 아직 8시도 채 안 되어 있었다.
깜깜한 밤에 네온 간판이 휘황찬란한 명동 거리로 나서자
시간도 아직 이른데다 그냥 헤어지기가 못내 아쉬웠는지 누가 먼저랄 거도 없이,
‘이차 생맥주 한잔 더 해야지?’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고 이미 발걸음은 모두 늘 2차로 가던 생맥주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생맥주도 기껏 500 한 두 잔이다.
술자리는 술 더 안마시면 일어나게 된다.

9시 겨우 넘어 마지막 건배를 하며 용일이가,
‘내년에도 우리 옛 친구들이 이렇게 만나 2차로 생맥주 한잔하며
송년 모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용일이는 10년, 20년 후가 아니라 당장 다가오는 내년만이라도
멤버들이 2차로 생맥주 한 잔 할 수 있을 만큼이나마 무사하길 소원하고 있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런 말을 들었다면 반드시 누군가가,
‘야, 용일아, 당연한 걸 그 무슨 그런 재수 없는 말을 하냐?’
하고 면박을 줬을 텐데 아무도 토를 달지 못하며 묵묵히 마지막 잔을 들이키고 있는데
남철이가 조심스럽고 숙연한 목소리로,
‘그럴 수 있도록 우리 모두 건강 조심해야지.’

아들 셋을 둔 정준이 막내아들 결혼식에 우리 동기로는 용혁, 용상, 용모, 재복, 병우 등
용자들 전원과 고교 입학 이전부터 정준이 단짝들인 세민이, 대현이가 참석했고
종원이, 경봉이, 도식이, 지철이, 현주, 명식, 남석, 등 정준이가 한 때 거주했던 분당 모임중
정준이와 친했던 멤버들과 정준이와 고교 때부터 절친 이었던 선호가 그야말로 수 십 년 만에
동기들 모이는 공식 자리에 얼굴을 보여 반갑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고
아직 몸이 완쾌되지 않은 승헌이도 부부 동반 참석하였으며
국환이, 원철이도 모습을 보였다.

정준이는 중학 때부터 절친 인 부랄 친구 길우가 대광을 나오는 바람에
길우 대광 친구들과도 오랜 세월 대등한 친구사이라 대광 고 출신 친구들도 대거 참석했다.

나도 대학 때부터 길우와 친해 덩달아 대광 친구들과도 안면을 트고 지내게 되었는데
결혼식을 마친 며칠 후 정준이가 전화를 해 결혼식 참석해 줘 고맙다며 점심을 같이 하자기에
누구 누가 참석 하냐니까,
너는 우리 동기나 대광이나 양쪽 다 두루두루 통하니까 대광 친구들을 초대한 자리에
합석하는 거라고 했다.

대광 친구들이 만나면 의례히 가는 구리 가까운 한강 북로 변 민물 매운탕 집에서
장어구이와 매운탕에 대낮이지만 소맥 몇 잔 곁들여 점심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청담 역 근처에서 길우, 정준이와 오랜만에 커피 한잔 하게 되었다.
셋이서 자리를 함께 한 건 셋이서 여름에 강원도 1박 2일 여행을 다녀오고
가을에 내가 춘천 국제마라톤 대회에서 마라톤 풀코스를 뛴 다음 날
영양보충 해 준다며 구리 고기 집에서 저녁을 같이 한 2014년 이후 거의 6년만이었다.
이 나이에 오랜만에 만나면 건강이야기와 옛날이야기밖에 할 게 없다.
이야기 도중 길우가,

‘ 이렇게 만나 술 한 잔 같이하고 커피 한잔 같이할 날도 기껏 한 10년 남았겠지?’

라고 하자 이내 정준이가 정색을 하며,

‘10년이 뭐야, 길게 봐야 앞으로 한 5년?
우리가 1년에 두어 번 만난다고 하면 앞으로 많아야 생전에 열 댓 번 만나고 마는 거야.‘

그래서,

‘ 하기야 금년에 발표된 통계청 인구 조사에 의하면 80세까지 살 확률은 30%,
  90세에도 생존할 확률은 5%밖에 안 된다고 하니까,‘ 라고 하자,

금방 길우가 목소리를 높이며,

‘무슨 소리야, 주변에 온통 80,90 노인들인데.’

하기야 우리 몇 년 선배는 인간이 150세까지 살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며
의학기술이 계속 발전하고 있어 우리세대는 100세를 넘어 120세도 살 준비를 해야 한다 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아주 심각하고 진진한 표정으로 이야기 한 적도 있었다.

금년 104세 되시는 어머니와 둘이서 살고 있는 경철이는 여태 결혼을 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결혼을 할 생각이 전혀 없다.
대신 물려받은 재산이 넉넉해 경제적으로는 아주 풍족한 편이라 어지간한 술값은
비록 투덜거리기는 하지만 지가 낸다.
하지만 절약이 몸에 배어 있어 절대 허튼 데나 자신을 위한 사치에는 한 푼도 쓰지 않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를 정리하고
서울 근교 어디 조용한 단독으로 옮기려고 해 가끔 통화도 하고 있고
어쩌다 술도 한잔 하고 있다.
정년 후 강남 대학 역사학과 명예교수로 일주일에 두 번 강의를 하며 소일하고 있고
일 년에 두어 번 중국 답사 다녀오는 게 유일한 해외여행이다.

“경철아, 돈 아끼지 말고 써. 누구 물려줄 데도 없잖아?
중국 갈 때 일등석 타고 중국 가서도 아끼지 말고 제일 좋은 호텔에 들고
술도 좋은 안주에 좋은 술 마셔.
옷이고 구두고 명품으로 두르고. 얼마나 살 거라고. “

“맞아, 우리 앞으로 살아 봐야 기껏 30년이지?”

30년 후면 100세다.
경철이는 어머님이 100세를 넘기도록 정정하시니까 지도 그럴 줄 알고 있다.


“ 종호 형, 아이 씨팔, 나 형 보러 못가.
  어제 친구 병원에 들렀는데 야단 즉사케 맞았어.  왜 이제야 왔냐고 말이야.
  주사 맞고 약 지어왔는데 당분간 술 입에도 대지 말래. “

경기 69회인 이 녀석은 횟수로는 한 학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어리광이 엄청나다.
족저근막염으로 반년을 고생하고 있는데도 술은 조금도 줄이지 않았는데 이 번에
된통 제대로 걸린 모양이었다.
통풍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 발은 좀 어떠냐?”

“ 몰라, 씨팔, 아무 감각도 없어. 내발 같지가 않아.
  그런데 일단 아프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오늘도 놀며 쉬며 북한산에 다녀왔어. “

“ 통풍 좀 수그러들 때까지 무조건 술 끊어. 통풍에는 술이 쥐약이래.”  

통풍이 어떤 증상인지 잘 모르지만 우리 신체 어느 부위에 질산인가가 응축 돼 그 부분에
예고 없이 마치 칼로 생살을 도려내는 듯이 격심한 통증을 유발한다고 한다.

“ 알았어, 형, 별게 다 걸려가지고.”

야, 임마, 그게 다 노환이야, 너도 늙었다는 거야.
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이 녀석은 어떻게 된 게 자기도 늙고 있다는 걸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오래 전 이혼하고 큰 딸은 커리어우먼으로 독립해 독신으로 살고 있고
둘째 딸은 출가 후 영국으로 이주 해 연노하신 어머님과 둘이서 살고 있는데
부모님들이 이북에서 월남해서 친척이 없는 데다 부부간도 그렇고
딸들과도 떨어져 살아서인지 유난히 정을 타는 친구다.

10여 년 전 내가 수 십 년 다니는 단골 집 중 하나인 해남 집에 데려갔더니
그 집 맛에 홀딱 빠져 가끔 인천으로 내려와 몸이고 혀고 다 꼬부라지도록 흠뻑 마시고
전철 막차 타고 돌아가곤 한다.

“ 형, 어머니 돌아가시면 집 정리해서 형네 가까운 데로 이사 갈 거야.
  해남 집 다니다보니까 인천이 너무 좋아. 형도 있고. “

“언제쯤?”

“ 어머니가 약간 치매 끼가 있지만 아직은 정정하셔서 앞으로 10년은 더 사시겠지?”

10년 후면 우리나이 80이다. 지나 나나 그 때까지 온전할지도 의문이다.

구 자경 목사의 신우 회 신년 예배 설교제목이 ‘죽음’ 이었다.
신년에 ‘죽음’ 이라니? 설교를 다 들을 때까지는 전혀 뜻밖이었다.

“ 목회를 하면서 가장 당혹스러운 일 중 하나가 병원으로부터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시한부 생을 선고 받은 환자를 문병하러 갈 때입니다.
  환자도 그렇고 유가족들도 기적을 바랍니다.
  목사를 통해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면 병이 낫고 생을 연장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제 그만 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하나님 만나러 가라고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못 합니다.
  환자와 유가족들이 원하는 대로 기도해 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우리 나이가 되면 죽음과 가까워져야 합니다.
  우리가 가까운 예로 우리 친구 박 영철이 경우에서도 봤듯이
  갑자기 죽음과 맞닥뜨릴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2020.02.08. 송 종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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