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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호(2020-03-07 21:31:57, Hit : 83, Vote : 4
  토요 살롱 292회 " 고집쟁이 핸섬보이 성용이를 떠나 보내며 "

우중이의 사망 소식을 3월 3일 오후 5시에 접하고 총무 대진이와 통화를 한 게
다음 날인 3월 4일 정오 무렵이었다.
그러고 그 날 저녁 8시 경에 또 다른 부고가 날아왔다.

“ 서울 고 24
  이 성 용 동기 별세.
  연건 동 서울 대 병원 장례식장 6호.“

아니 성용이가?
우리 동기 그 성용이?
혹시 우리 동기 중에 이 성용이란 동명이인이 또 있는 게 아니야?
망연자실하여 바로 대진이에게 전화를 했으나 통화 중이었다.
그러고 바로 떠오른 이름이 성용이의 절친 경봉이었다.
경봉이도 통화 중이었다.
이제나 저제나 전화를 기다리며 안절부절 하고 있는데 경봉이가 먼저 리턴 콜을 해주었다.

“경봉아, 이게 사실이냐?”

“나도 문자보고 너한테 전화하고 거야. 어찌된 영문인가 하고. ”

“대진이 전화하니까 통화 중이고.
니가 성용이와 친했으니까 뭐 좀 잘 알겠지 하고 전화했었는데.
몇 년 전 성용이와 술 마시다 성용이가 그러더라,
미국 출장길에 LA에 갈 일이 없었지만 오로지 너 만나러 일정을 변경해 간 적이 있는데
그 때 니가 도저히 나 올수 없는 입장인데도 찾아와 하루 밤 같이 보낸 이야기를 해주며
그 때 니가 보인 의리를 못 잊는다고 했거든.
듣고 보니 성용이가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겠다 라는 생각이 들더구만.
알고 보니  최 경봉이가 의리의 사나이데?  
성용이가 경봉이와는 그런 걸 떠나서라도 제일 친한 친구 중 한명이라고도 하고. “

“ 성용이가 그랬어? 내가 좀 알아보고 연락 줄게.”  

“ 내일 저녁에 빈소에 가 보려고 하는데 너는?”

“나도 일 때문에 낮에는 힘들고 저녁에나 가야 하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만나서 하도록 하자. “

다음 날 아침 대진이와 통화가 되었다.

“ 어떻게 된 거야?”

“나도 어제야 들은 이야기니까 잘 모르는데 담도 암이래.”

“ 지난 번 재문이 모친상에 갔더니 조문, 조의금 사절이던데 문상은 받아?”

“그럼 찾아온 손님이야 받지.”

“ 그럼 저녁에 가 봐야겠다. 경봉이도 오기로 했어.”

그러고 경봉이에게 전화를 했다.

“ 종호야, 아무래도 못 가겠다. 미안하다. ”

요즘 사태가 사태인 만큼 충분히 이해가 된다.
더구나 경봉이는 최근 심장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다.

전철을 타고 종각에서 내려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연건 동 서울 대 병원으로 가는 내내
동가들 중 누구를 만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성용이와 그야말로 부랄 친구이자 소문 난 단짝이자 평생을 함께 한 민수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다.
경봉이도 못 오겠다는데 과연?

나는 성용이와는 고1때  같은 반이었지만 별로 교류가 없었다.
성용이는 중키정도라 가운데 줄에 앉았었고 나는 맨 뒤 줄이라
우선 대화할 수 있는 부류도 달랐고 대화하거나 수업시간 중에 장난치기에는 거리도 멀었다.
게다가 성용이는 본교에서 올라와 중학 때부터 사귀어 온 친구들도 많은데
구지 생전 처음 보는 데다 삐쩍 마르고 구부정하게 키만 크지
꼬질꼬질 촌 태 줄줄 흐르는 촌놈을 친구로 사귀자고 먼저 다가 올 이유가 없었을 거고
나도 환경이 너무 생소해 거기에 적응하기도 급급한데
여기저기 멀리까지 찾아다니며 자신을 소개하고 광고하고 다닐 만큼 경황도 없었다.

아마 내가 좀 주눅이 들어 일부러 가까이 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거 같다.
성용이는 언제나 빳빳이 줄 선 말쑥한 차림에 희고 깨끗한 피부에 잘 생긴 미남에
언제나 희고 가지런한 이빨을 들어 낼 정도로 서글서글한 웃음이 가시지 않는
부자 집 귀공자의 전형이었다.
그래서 나와 같은 부류로 후줄근한 차림에 궁기가 줄줄 흘러 좀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같은 촌놈 출신이거나 같은 계급 출신으로 보이는 친구들부터 사귀려고 한 게 아닌가 싶다.

그렇게 서로 얼굴만 알고 지내며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 하다가
2학년 올라가며 문과와 이과로 나누어지게 됨에 따라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오다가다 부딪치는 일도 거의 없었고 대학도 서로 갈라져
얼굴도 보지 못하고 어쩌다 소식을 흘려듣는 경우도 있었지만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상당히 오랜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다가 성용이를 다시 조우하게 된 건 졸업하고 10년 뒤인 1981년 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곳에서였다.

당시 나는 1978년 말에 제세에서 선경으로 옮긴 후 이듬해인 1979년부터 해외출장이 잦아
본사 근무 보다 해외에 나가 있는 시간이 더 길었었다.
1980년에는 해외출장이 더 잦아져 2달 해외 출장, 한 달 본사 근무 꼴이었다.

그 해 연말 쯤 동남아 출장에서 돌아와 해를 넘기고 얼마 되지 않았지만
또 다시 말레이시아로 출장 준비를 하고 있던 1981년 1월 중순쯤이었던 거 같다.
담당부서 부장이 부르더니 선경화학 수출과장이 협조를 요청하는데 가서 이야기 들어보고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주라고 했다.

당시 선경그룹에서는 돌아가신 최 종현 회장이 오디오와 비디오테이프를
국내 최초로 개발하여 특허를 받아 7년간 독점 생산, 판매권을 확보하여
이를 생산, 판매하기 위해 선경 화학을 설립해 공장을 짓고 상업생산을 막 시작하던 때였다.
선경 본사 건물은 을지 로 입구, 한전 옆에 위치한 자체빌딩이었는데
선경화학 사무실은 오래 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충무로 어디쯤인가
남의 빌딩에 세 들어 있었다.

선경화학 수출과를 찾아 들어서니까 이제 막 발족한 회사라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곁눈질도 안 하고 바로 맨 앞에 앉아 열심히 뭔가 타이프를 치고 있는 여직원에게
수출과장과 약속이 되어 왔다니까 한번 쳐다보고는 하던 일을 즉시 멈추고 발딱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뒤돌아가 누군가에게 물어보더니 회의 들어갔는데 금방 나올 거라며
과장 자리 앞에 놓인 보조의자로 안내했다.
그러면서 돌아보니까 거기에 성용이가 싱글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학교 다닐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깜작 놀라며,

“ 아니 성용이 아니야. 여긴 왼 일이야?”

“ 어, 지난해 말에 입사했어. 공채 1기로.
  성수하고 같이 왔는데 성수는 경리과로 배치 받고 나는 수출과.
  참, 성수 불러올게. “

그 이후 업무 관계로 몇 번 선경 화학 수출과를 들락거렸지만 타이트한 스케줄로
성용이와 반갑게 악수나 나누는 정도였지 술 한 잔커녕 밥 한 끼, 차 한 잔도 같이 못 했다.
그러다 이듬해 초 나는 인도네시아로 나가 7년 후인 1989년에야 귀국했고
귀국해서도 간간히 소식을 흘려듣기는 했지만 분야가 다르고 만나는 친구들이 다르다보니까
서로 얼굴이라도 대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렇게 20여년 속절없이 세월만 흐른 후 뜻밖에 7,8년 전 동기 회 송년회에서
성용이를 만났는데 왜냐하면 나는 비교적 전체 동기 모임에는 잘 나가는 편인데도
그 전에 성용이를 동기 회 모임에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기치 않은 만남이라 그렇지 않아도 반가운데 내가 좀 늦는 바람에
마침 비어 있던 성용이 옆 자리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물론 성용이는 “어이, 송 교수 어서와.” 하며 특유의 만면 가득한 미소로 반겨주었는데
나를 뜬금없이 교수로 칭하는 거로 봐 성용이가 짐짓 시침 떼는 척 하지만
토요 살롱을 읽었거나 읽고 있는 거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내색은 서로 일체 하지 않은 채 이런 저런 안부를 나누고 술도 주고받고 하다가,

“송 교수, 그런데 나는 이런 자리가 너무 싫어.
얼굴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같은 학교 나왔다는 이유로 만나 반갑다고 악수하고.
친한 친구들끼리도 어떤 때는 서먹서먹한데 정말 좌불안석이야.
재미도 없는데 웃어줘야 하고.
경봉이가 하도 가자고 해서 왔는데 역시나야.
언제 우리끼리 술 한 잔 하자. “

말만 그렇게 했지 또 까맣게 잊고 서로 연락을 않고 2,3년 세월이 흐르고 있다가
1995년에야 성용이를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나로서는 또 뜻밖일 수밖에 없었다.

바둑이 영희가 파라과이에서 1995년에 사망해 2015년이 20주기였었다.
그래서 영희와 친했던 경봉이에게 영희 20주기에 즈음하여 영희와 친했던 친구들을 모아
조촐하게나마 추모모임을 가지는 게 어떠냐니까 반색을 하며 자기가 연락을 맡겠다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나는 영희를 학교 다닐 때는 전혀 모르다
대학 다니면서야 태웅이를 통해 알게 되었고 그렇게 여러 번 만나다보니까 친해졌고
대학 졸업 후에는 주로 둘이서 만났기 때문에 영희의 학교 다닐 때 교우관계를 잘 몰랐다.

그 때 경봉이가 명단을 작성하고 연락을 취한 친구들 중에 성용이가 들어 있어 의아했는데
20주기에 술 한 잔 하면서 비로소 성용이가 영희와 친하게 된 사연을 듣게 되었다.
친하기도 했지만 비즈니스 등 여러 가지로 얽힌 사이였다.

20주기 때 누군가가 영희가 7월에 작고했으니 이를 기화로 매년 7월에
그러니까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모임을 갖자고 제안하여 다들 좋다고 하였으나
이듬해인 2016년에는 연락책인 경봉이가 날짜를 차일피일하다가 못 만나게 되었고
그 다음해 2017년에는 그나마 성용이가 서두르고 챙기는 바람에
마침 귀국해 친정에 머무르고 있던 영희 부인까지 참석할 수 있어
모처럼 회상에도 젖으며 화기애애한 자리를 가질 수 있었었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2018년에는 경봉이가 구급차에 실려 가는 일이 발생하여 연락이 부실했고 지난해도 그랬다.
그러는 동안 성용이와 술 한 잔 하자며 벼르기만 했지 전화 통화만 몇 번 한 게 고작이었다.

빈소를 찾아 들어가기 전에 고개를 돌려 맞은편의 접객 실을 슬쩍 보니까
접객 실 전체가 텅텅  비어 있었지만 제일 가장자리 한쪽 구석에
낯익은 얼굴들이 몇몇 옹기종기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언 듯 민수와 재문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휴, 다행이다.’ 하고 빈소를 들어서는데 민수가 접객 실에서 달려 나와
벌겋게 충혈 된 눈으로 먼저 맞아주었다.
“ 종호, 와 줘서 고맙다. 민수야. ”

“ 그래 수고가 많구나. 여기 오면 너는 꼭 만날 줄 알았지. ”

영정 사진 속의 성용이는 만년의 트레이드마크인 백발에 굵은 뿔테 안경을 쓰고
가지런한 아래 위 이빨을 다 드러내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환하게 파안대소하는 평소의 모습 그대로였다.

세례명과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명패가 있었고 아직 어려보이는 외아들,
백발까지 빼 닮은 남동생, 그리고 여동생이 상주로 예를 갖춰 주었다.
접객실에는 재문이, 민수, 서 세원, 김 귀식이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세원이는 이미 혀가 반쯤은 돌아가 있었다.

“ 12시부터 마시고 있어.”

성용이의 영원한 짝 민수가 상주 노릇을 하며 띄엄띄엄 들어오는 손님을 맞고 있었다.
재문이는 성용이와 학교 다닐 때부터 친했고 서울 공대 다닐 때는
지금은 LA에 거주하고 있는 강 병곤, 민수, 성용이와 넷이서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주로 피맛 골, 청진 동 사이길, 허름한 싸구려 술집을 전전하며 퍼마시고 다녔다고 한다.
귀식이는 성용이의 근무지가 천안일 때 대전 지역 동기들과 자주 술자리를 하며
친해졌다고 한다.
세원이는 서강 대를 같이 다녀 아주 오래 절친 사이였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 전혀 예기치 않게 김 대현이가 도리우찌 모자를 늘러 쓰고
마스크로 코와 입을 막아 안경 쓴 눈만 빼꼼이 내 놓고 쭈삣쭈삣 팔자걸음으로 들어왔다.
성용이하고 전혀 매치가 안 돼 “성용이하고는 어떻게?” 하고 물었더니
“ 대전에 있을 때 친했다기보다 내가 일방적으로 신세만 졌지 뭐. ”
8시가 넘어 건축사 종원이도 나타났다.
성용이하고는 설계 관계로 친분을 맺었다고 한다.
낮에 대진이가 다녀갔고 내가 오기 직전에 모 태서가 다녀갔다고 한다.

대진이가 담도 암이라고 하여 그런 줄 알았는데 사실은 간암이었다고 한다.
민수에 의하면 성용이가 자기가 간암이란 사실을 2년여 전에 알았지만
가족을 포함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서 병원 치료를 받으며
다니던 외국 계 회사를 그만 두는 등 조용히 주변 정리를 했다고 한다.
가족들에게는 불과 한 달여 전에 알렸고 사망한 날 새벽에 입원하여
그 날 오후 4시에 임종했다고 하니 병원 입원 기간은 겨우 반나절 밖에 안 되었다.
민수가 새벽 4시에 연락을 받고 부산 발 KTX 첫차로 상경해 줄곧 병실을 지켰다고 한다.

성용이의 사망 소식을 영희 부인에게 알렸더니 파라과이에서 다음과 같은 답장이 왔다.

“ 종호 씨, 소식 주셔 감사합니다. 저도 어제 엄청 많이 울었습니다.
  잘 생기신 얼굴에 늘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셨던 성용 씨!
  젊은 시절 성용 씨와 함께 했던 바닷가의 추억들을 뒤로 한 채......
  어찌할 수 없는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과....
  영희 씨의 생각이 떠올라 온 마음을 사로잡은 하루를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기도 속에 위로 받고 내게 또 하루를 허락하심을 감사하며 열어갑니다.
  성용 씨가 지금은 영희씨 만나서 함께하고 있겠지요.
  종호 씨 말씀대로 영희 씨는 천국에서 이제야 외롭지 않을 거 같습니다. “

조문을 마치고 돌아와 다음 날 아침 장례를 치르는 민수에게 수고 많다는 톡을 보내자,

“ 어제 와 줘 고맙고.
  성용이가 잊고 지냈던 옛 친구를 데려다주고 갔네.
  중간에 고생은 했지만 배짱 고집대로 살고 갔으니 됐다.
  부끄럽지 않은 놈이니 잘 보내줘야지.
  서울 올라 올 때 연락할 테니 종로 뒷골목에서 한 잔 하자구. “

그리고 납골당에 안치하고 부산으로 내려가서는,

“ 우리 성용이 좋은 아파트로 잘 모셨다.
  집에 돌아 와 여러 병을 마셔도 섭섭하네.
  하, 그 새까 영정 사진은 웃으며 갔는데. “

민수는 아마 떠나보내는 내내 많이 울었을 거다.
화장하러 관 들어갈 때는 통곡을 했을 거고 유골함을 들고도 눈물을 뿌렸을 거다.
집에 돌아가 혼자 술 마시며 또 많이 훌쩍였을 거 같다.
죽마고우, 시골 친구를 아주 일찌감치 둘이나 떠나보낸 적이 있는 나는
그 심정 다는 몰라도 조금은 공감할 수 있지 않나 싶다.
비록 머리는 백발이지만 철따구니 없는 아이처럼 환하게 웃는 영정 사진을 보며
나도 울컥했는데 하물며 민수야.
  
누구한테 신세지고 폐 끼치고 얻어먹는 거 제일 싫어하며 꼿꼿이 지 고집대로 살다
가는 길도 평소의 성용이답게 병마의 고통을 마지막까지 혼자 인내하다 간
성용이의 고집을 존경하며 이제 고인이 된 성용이의 명복을 빈다.
2020.03.07. 송 종 호.  




토요 살롱 293회 " 故 이 동 옥 20 주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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