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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호(2020-03-21 21:13:38, Hit : 50, Vote : 2
  토요 살롱 294회 " 봄을 기다리며 "

동옥이 20주기를 맞아 우성이를 필두로 개별적으로 일일이 전화를 하여
20주기 추모에 대한 의견을 물었더니
하나같이 화들짝 놀라며 이구동성으로 대답하는 첫 마디가,
‘아니 벌써 20년이나 된 거야?’ 였고
그 다음이,
‘잊지 않고 있었구나. 좋은 생각이다. 당연히 추모모임을 해야지.’ 였다.

아무리 가까웠던 사이였더라도 이별한 후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특별한 은원관계가 아닌 한
누가 이야기를 꺼내면 그 때서나 저 밑에 처박아 둔 기억을 꺼내
서로의 기억들을 퍼즐 풀듯이 맞춰 가며 옛 추억에 젖지
평시에는 까맣게 잊고 지내는 게 일반적이다.
부모 형제, 피를 나눈 혈육이 아닌 한 스스로 기억을 더듬어 회상에 잠기는 경우는
드물 수밖에 없다.

언젠가 승종이가,
‘내가 죽고 나면 날 기억해주는 사람 없겠지?’ 하기에,

‘승종아, 눈 뻔히 뜨고 있는 인간들도 서로 몇 년 못 보면 이름도 가물가물해지는데
죽은 놈을 어떻게 뭐 하러 기억하겠냐?‘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자기를 기억해주는 누군가가 있는 한 이 세상을 완전히 떠난 건 아니다.’ 라고 한다면
지나치게 억지를 부리는 말일지 모르지만
내 마음 속에서 깡그리 지워지지 않는 한 그 사람과의 인연이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다고는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그 인연을 이어가고자 하는 바람에서 기일을 잊지 않고
기일에 뭔가 기억에 남을 만한 행사를 하려고 하고
특별한 날을 정해 성묘를 가고 제사를 지내곤 한다.
그냥 잊어버리고 냉정히 인연을 정리하기가 너무나 아쉬운 거다.
마음속에서 떠나보내기가 싫은 거다.

동옥이 20주기 기념행사는 비록 무산되었지만
졸업 40주년 기념문집 ‘봄을 돌아보다.’에 실린 동옥이의 글과 시를
다시 읽어보는 계기가 되었다.
예전에 여러 번 읽었지만 그 때와는 완전히 다른 기분이었고 다른 맛이었다.

옛날에는 ‘동옥이가 자기 멋에 취해 있을 뿐이지 문재가 그렇게 뛰어나지 않다.’ 라고
아주 일찌감치 단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옥이가 쓴 글이던 시를 좀 무시하고 있었고
그런 편견을 토대로 글 자체의 문학적 가치를 평가하다보니까
글이나 시가 내포하고 있는 정서나 감성을 느끼려고 하기보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쉽게 읽어버렸는데
이 번에는 한 줄 한 줄 한 귀 한 귀 새기고 되새기며 몇 번이고 읽게 되었다.
동옥이의 시와 글 속에 동옥이가 시퍼렇게 살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옥이가 고2때 이상을 추종하여 써 갈긴 첫 작품인 단편 ‘童 骸’를 정규에게도 들고 갔지만
나에게도 들고 와 작품 평을 해 달라고 하며,
‘종호, 너는 책도 엄청 읽고 니가 쓴 글도 읽어봤는데
너 같은 친구가 국문과를 가야하지 않겠냐.
나도 국문과 가려고 하니 우리 국문과 같이 가자.’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신문 문예반에서 병채의 글 솜씨를 보고 나의 한계와 둔재를 일찌감치 깨닫게 돼
자신에 대해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문예반을 즉각 탈퇴하고
문학 외의 길을 모색하고 있던 터였다.
그렇게 방황하다 얼떨결에 지망한 게 정치학과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낙방한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 가끔 당시를 떠올리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나에게는 돌아가신 부모님들이야 당연하지만 동옥이 외 매년은 아니더라도 5년 주기로나마
직접 성묘를 가거나 그게 안 되면 마음으로라도 나름 추모를 하는 고인이 몇 명 더 있다.

35년 전인 1985년 서른다섯의 새파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나의 어릴 적 친구인
전 삼성전자 윤 종용 부회장의 막내 동생, 종원이,
30년 전인 1990년 겨우 서른둘에 일본지사 부임을 앞두고 자기 부서도 아니고
다른 부서 캔 미팅에 따라갔다 사고로 변을 당해 갓 백일 지난 아들을 두고 떠난
옛 직장 선경의 후배, 이 호 성,
그리고 25년 전인 1995년 머나 먼 타국 파라과이에서 사고사한 바둑이 영희가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1997년 12월 초에 2003년 쓰러진 후 14년이란 길고 긴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동훈이의 생전에 눈 꼬리에 눈물이 고이도록 파안대소 하던 모습도
쉽게 잊어지지 않을 거고
지난해 10월 가을을 남기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난 영원한 미소년 영철이의
순진무구한 아름다운 미소도 내 마음이 다 하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마음속에 담겨 있을 것이다.
아마 나이가 나이인지라 10주기까지 기다릴 수는 없고
5주기부터라도 추모 모임을 주선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종원이 성묘는 언제나 한식인 4월 5일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우리와 다섯 살 차이 나는 바로 위형님께 안부 겸 성묘 일정을 물었더니,

‘ 이번에는 못 내려갈 거 같십니더. 영천에도 코로나가 집단으로 확진됐다고 카는데
  우리 같은 노인네는 전염 취약 층이라서.
  그것 보다도 우선 마누라가 질겁하며 못 가게 해예.‘

종용이 형님은 다섯 살이나 위인데도 우리에게 반말을 하지 않는다.
형님을 만나게 된 게 우리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인데
그 때에도 자신은 이미 군대를 다녀왔는데도 반말을 하지 않았다.

‘ 종호씨는 요즘도 약주 한잔씩 합니꺼?
  나는 요새도 소주 두병은 마시는데 문제는 그 다음 날이라예.
  영 맥을 못추는 기라예. 그라고 걷는 게 영 부실해예.
  내가 느끼기에도 비틀비틀 허접시러운기라.
  원이 30주기 때 그 때만해도 지금 보면 싱싱했던 거라.  
  탁구도 매일 치고 그랬는데
  마누라가 탁구 치러 가서 아줌마들하고 맨 날 술 먹고 다닌다고 못 가게 해서
  몇 번 안 가다 보이까 영 안 가게 되데예, 허허“

“참 형님도, 여전하시네요. 형수님이 금족령 내릴 만 했네요.
종용이 형님도 건강하시지요? 우리보다 열 살 위시니까 내년이면 팔십이시네요.”

“ 고관절이 안 좋은 거 말고는 뭐 그럭저럭 괜찮은데 마 나이는 어쩔 수 없는기라.
  종호씨도 가 봤지요, 역삼 동 빌딩?  그거 아직 가지고 있고
  사무실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대외 활동은 거의 안 하고
  그냥 찾아오는 지인들하고 만나고 밥 먹고 그러고 있습니더.
  나도 하던 공장 큰 조카한테 물려줬는데 일마가 열심히 하고 있습니더.
  아, 참 큰 조카가 이번에 혼자라도 내려갈라 카던데
  종호씨, 우리 장조카 만나봐서 알지예? 글마한테 연락하라고 할기예. “

“호영이는 와이프가 상해로 발령 나 상해를 왔다 갔다 한다고 하고
호영이 엄마 이야기로는 종용이 형님이 태영이를 호영이한테 붙여놨다고 하던데
아직도 같이 다니고 있습니까? “

“ 예, 그러고 있는데 글마 들 뭐 하고 돌아다니고 있는지 바쁜 긴 억수로 바쁜지
  코빼기 보기도 힘든데 아직 뭐가 표가 안 나는 거 같애예.“

서울 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하버드와 미시간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있던
종원이 큰 아들 호영이의 와이프는 예일에서 MBA를 취득한 재원으로
크라이슬러에 입사해 고속 승진을 거듭한 끝에
2년 전 크라이슬러 상해 법인 부사장으로 발령 나 가족이 모두 상해로 이주했고
호영이는 서울과 상해를 오가며 벤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30주기 때 종원이 산소에서 술을 말없이 들이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둘째 지영이는
2년 전에 삼성 전자 미국 지사로 떠났다고 한다.
그 때 갓 태어난 딸 아이 아빠가 된 그 녀석이 술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입술을 실룩거리며
흔들리는 목소리로 툭 던진 말,

“저희 아버지는 겨우 서른넷에 스물아홉밖에 안 된 마누라와
여섯 살, 네 살 어린 두 아들을 두고 뭐가 그리 급하고 한이 많았던 겁니꺼?“

뭐라고 대답하기가 당황스러웠던 이 말이 아직도 귀에 멤 돈다,

30년 전에 불의의 사고로 서른둘의 창창한 나이에 세상을 떠난 호성이의 기일은
5월 26일로 토요일이었다.
3일장을 치르고 장례날인 28일은 월요일이라 출근하자마자 본사를 텅 비워둔 채
버스를 몇 대를 대절하여 춘천 영결식 장으로 내려온 선경 본사 전 임직원들과
소식을 듣고  달려온 나 같은 OB들의 오열 속에 호성이 장례를 치른 후
업무상 나를 수장으로 하여 계보를 이어가며 호형호제하던 열 명의 멤버들이
앞으로 10년간은 매년 5월 마지막 일요일에 호성이 성묘를 하자는 결의를 하였고
그 약속은 지켜졌었다.

해외 출장 등 불가피한 경우를 당한 멤버를 제외하고 모두 5월 마지막 일요일 오전에
가족들과 함께 압구정동 우리 집에 모여 다 같이 출발 해 성묘하고
벼락 소 유원지 근처에서 반주 곁들여 점심을 먹고 오후 느지막이 헤어지곤 했었다.
언젠가는 국내에 한 녀석밖에 남아 있지 않아 나하고 단 둘이 성묘를 다녀온 적도 있었다.
물론 나는 5월 마지막 일요일은 여하한 일정이나 출장 등을 미리 연초부터 피했기 때문에
10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근속할 수 있어 호성이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10년째 되던 해에는 산소에 올라가며 마침 성묘를 마치고 내려오는
호성이 부친, 동생, 호성이 부인과 열 한 살 된 아들을 만나는 우연도 있었다.
이 때의 장면과 감정은 5년 전 25주기에 즈음하여 써 올린 토요 살롱 148회 ‘初 夏’ 에
대체로 묘사해봤었다.
금년 30주기를 맞아 5월 마지막 일요일이 5월 31일로 월 마지막 날인데다
실지 기일을 지나서 그 전 주인 5월 24일에 성묘 가기로
아직도 현역에 있는 두 막내를 포함해 이미 지난 해 연말 모임에서 정하였다.

25년 전에 파라과이에서 사망한 바둑이 영희 기일은 7월 6일이다.
5년 전 20주기부터 경봉이를 연락책으로 나, 영신이, 성용이, 종덕이, 윤재 등이 모였었는데
일 년의 대부분을 사업체가 있는 아르헨티나에 가 있는 종덕이는 언제 귀국할지 예정이 없고
성용이는 다시는 볼 수 없는 불귀의 객이 된 데다
경봉이도 심장 수술 두 번한 후 그렇게 애호하던 술, 담배 다 끊고
‘자기는 다시 태어나 제2의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선언하며
어떤 모임이고 흥미가 시들하게 되어 바둑이 25주기인 금년은 물론
앞으로 그런 명목으로 모일 기회가 다시 있을지 모르겠다.
여름이 오면 다시 연락들을 해 보겠지만 뭔가 애석하고 서운한 생각이 앞선다.

“아니 이제 보니까 산수유가 벌써 다 피었네요.”

날이 많이 길어져 6시 반이면 사방이 훤해지며 동녘에는 이미 불그레 햇살이 돋는다.
운동을 마치고 내려갈 때도 어둑어둑한 기가 완전히 물러나지 않아
눈을 내려 깔고 발밑만 쳐다보고 다니느라 주위를 살펴보지 못했는데
그렇지 않아도 조그마한 얼굴을 큼지막한 하얀색 마스크로 거의 다 가리고
모자까지 깊숙이 눌러 써 눈만 빼꼼이 뜨고 빤히 바라보는 전직 이발사 출신 할아버지와
허벅지 근육을 안마하는 스트레칭 기구를 마주하고 서서
운동 끝 무렵이라 가쁜 숨도 자자들어 한가로이 코로나 이야기를 하다
문득 시선을 멀리 돌리자
각종 운동 기구가 설치되어 있고 에어로빅과 배드민턴을 칠 수 있는 작은 운동장 너머
내리막 경사를 울창하게 덮고 있는 숲 앞줄에 늘어선 산수유나무에
연두색 애벌레 같은 꽃잎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걸 비로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고 주변을 살펴보니 아침 이슬을 먹어 축축한 둔덕에도
거짓말처럼 새파랗게 올라온 잡초가 제법 무더기를 이루고 있다.
아니 하룻밤 사이에?

신종 바이러스의 창궐로 각종 모임이 다 취소되고 약속도 안하게 되고
다니는 교회도 문을 닫아 활동력도, 움직이는 동선도 대폭 줄어들어 일견 무척 한가롭고
하품이 날 정도로 심심하기 짝이 없는 일상일 거 같은데도
눈에 띄는 게 다 어수선하고 마음도 답답해
오히려 항상 어딘가에 쫓기는 기분이라 실지로는 여유도 없고
주위를 제대로 살펴 볼 겨를도 없이 그냥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만 보내고 있으면서
절기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아무 관심 없이 지내다보니까
어느새 어제가 바로 춘분이란 것도 모르고 있었다.

“ 아니, 이제야 보셨어요? 산수유가 핀지 언젠데요. 일주일도 더 된 거 같아요.
  며칠 안 있어 개나리 피고 곧 이어 벚꽃도 필 텐데요 뭐, 절기는 못 속여요.
  우수, 경칩 지나고 어제가 춘분이었잖아요? 덥다는 소리 나올 날도 머지않았어요.“

중국 우한 발 바이러스가 이렇게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경제를 공황 상태로 빠뜨릴 줄
아무도 예측하지 못 했다.
최 취약 노인계층이라고 통장이 주기적으로 마스크를 집으로 직접 가져다주고
그 전에 미세먼지 방지용으로 받아 둔 거까지 쓰지 않고 뒀던 재고가 넉넉한데다
한 번 사용한 거는 모아뒀다 매주 빨아 쓰고 있어
아직 마스크 사러 약방에 가서 줄 서 보지는 않았지만
마스크를 구하느라 난리도 아니고 방송마다 마스크 부족 사태라고 아우성인데
다들 어디에서 구했는지 전철이고 어디고 어디에 가던 누구나 마스크를 쓰고 있어
마스크 하지 않고는 눈치가 보여 나다니지도 못 하게 되었다.

사방이 마스크 천지라 마음도 주변의 풍경도 다 뭔가로 가려 진 거 같아 답답하고 칙칙하다.
예년에 비해 공기가 맑은 게 그나마 위안이지만
모두가 마스크를 하고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 동복 차림이라 계절의 변화를 실감할 수가 없다.
그래서 언젠가 슬그머니 봄이 들어앉았는데도 여전히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다.

태수의 카카오톡 창을 열면 흰 구름이 엷게 스치는 푸른 하늘 아래
맨 아래 쪽부터 잘 다져진 길 사이에 보리나 밀처럼 보이는
누런 곡물열매가 알알이 달린 푸른 줄기가 빽빽한 밭이 펼쳐진 화면 가운데에
새까맣게 염색을 하고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 안경 쓴 태수의 천연색 프로필이
동그라미 속에 박혀 있고
그 바로 아래에 다음과 같은 영문이 써져있다.

          “ It shall also come to pass "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래야 진정한 봄을 맞을 수 있을 거 같다.

봄이 왔지만 그래도 봄을 기다리며,
2020.03.21. 송 종 호.




토요 살롱 295회 " 逆 境 "
토요 살롱 293회 " 故 이 동 옥 20 주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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