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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호(2020-05-30 21:14:01, Hit : 180, Vote : 34
  토요 살롱 302회 " 맹꽁이 우는 소리 "

아직은 한기가 남아있는 쌀쌀한 봄바람에 실려와
옛날 어릴 적 동네 누나들의 비릿한 살 냄새 섞인 분 내음을 상기시키며
부드럽게 그러나 야릇하게 마음을 어지럽히던 아카시아 향기가
언제부터인지 짙은 초록의 거칠고 쌉쌀한 풀잎, 나뭇잎 내음과 함께
스칠 듯 말 듯 감질나게 코끝을 자극하는 이름 모를 들꽃 향으로 바뀌었다.

가지가지 원색으로 화려하게 산야를 장식했던 철쭉꽃도 한바탕 꿈이었나 싶게 죄다 사라져
이미 머나먼 추억이 되어버리고 다닥다닥 무리지어 있는 나지막한 철쭉나무는  
짙어지고 살지고 무성해진 초록 이파리로 뒤덮어 둔덕이고 산책길 양 옆이고
곳곳에 초록 덩어리 관목 숲을 이루어 주위에 마구 자란 초록 야생풀들과
쭉쭉 뻗은 활엽수 침엽수 초록 나뭇잎과 함께 사방 온통 초록 푸른 전경의 일부가 되고 있다.

하늘 정원 한 켠에는 언제 심었는지 주황색 금잔화 꽃이 피어나고 있고
다른 한 켠에는 올망졸망한 장미나무 줄기에서 새빨간 장미 봉우리가 돋아나고 있다.
목책을 타고 기어 올라간 넝쿨장미의 겨우내 볼품없이 말라 비틀어졌던 줄기도
이제야 초록 옷으로 바꿔 입으며 새로 돋아난 가지 사이사이에는
벌써 탐스럽게 벌어진 새빨간 장미가 군데군데 고개를 내밀고 있다.

목책 바깥으로 심어 놓은 장미나무는 줄기고 가지고 새파란 잎으로 뒤덮였고
와중에 성질 급한 분홍색 장미 몇 송이가 어느새 봉우리를 활짝 터트렸다.
장미는 여러 수 십 종류에 색깔도 흰색부터 진홍까지 현란하게 다양하다.
그러나 아직은 새 생명을 불어 넣고 잎을 돋아나게 하고 꽃을 피우기에 급급해서인지
모양만 장미지 항기가 없다.
그럴지라도 숲과 정원을 온통 장미로 화려하게 장식할 장미의 계절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번 5월은 근래에 드물게 그야말로 명실상부 계절의 여왕이란 타이틀을 되찾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거 같다.
최저 12,3도, 높아야 15도내에서 최고 20도 언저리, 25도 내의 최적의 기온,
깨끗하고 상쾌한 공기, 맑고 푸른 하늘, 각양각색 꽃들이 시의 적절하게 피고 지며
눈과 코를 황홀하게 하고 사방이 녹색으로 짙어가는 싱그러운 5월이었다.

어쩌다 공기가 탁해지려면 대략 일주일 간격으로 적시에 내려주는 적당한 량의 비가
대기를 깨끗이 씻어주는데다 초록 푸르름에 윤기를 더해 줄 뿐더러 또 해갈도 해 주어
봄이면 의례히 난리를 치르던 물 부족으로 인한 봄 가뭄 현상도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대기가 건조하지가 않아 우리 같은 비염 환자들도 맑고 청량한 공기 마음껏 들이키며
수월하게, 오히려 가는 세월 붙잡을 수 없어 못내 아쉬워하며
5월의 항취를 남들처럼 마음껏 즐기며 넘길 수 있었다.

눈 구경 제대로 해보지 못 할 정도로 지난겨울을 따뜻하게 보내
그 대가가 과연 어떨지 내심 걱정 반 기대 반이었는데
비록 코로나로 곤욕을 치르고 있지만
환경만큼은 단지 5월뿐 아니라 봄날같이 보낸 겨울 덕분에
3,4월 언제 봄이 시작되었는지 감지하지 못 할 정도로 슬그머니 봄이 시작되었지만
더위 한 번 제대로 느끼지 못 할 정도로 쌀쌀한 날이 계속된 마무리되는 날까지
기온, 습도, 공기, 더 할 나위 없이 최고의 봄을 보냈다.

봄이 되면 겨우내 얼어붙었던 몸이고 마음이고 부드럽게 감싸주는
나긋나긋한 봄바람에 취하거나
산야를 화려하게 수놓는 꽃이고 뭐를 감상할 겨를도 여유도 없이
오로지 하늘을 뒤 덮고 시야를 가리는 황사와 미세먼지,
그리고 콧물과 재채기로 인한 고통 속에
하루빨리 지긋지긋한 봄이 지나가길 기다릴 수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우리 생전에 다시는  우리가 소시 적에 배우고 경험해
의례 봄이란 그런 거라고 입력되어 있던 그런 봄을 마음속에 그리기만 하고
실제로 맞이해 보지는 못 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코로나와 더불어 그렇게 그리던 추억 속에서만 존재했던 봄이 이렇게 찾아와
이렇게 누릴 수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

그러면서 절기상 봄은 지나갔다.
전문가들의 의견으로는 기상이변으로 예년보다 평균 기온이 낮은 저온의 봄이었다고 한다.
벚꽃이 예년보다 빨리 핀 걸 보면 그렇다고 초봄에 영하의 날이 계속되어
예년에 비해 더 추웠던 건 아니었던 거 같다.
아마 4,5월 날씨가 평년보다 온도가 낮아서 그러지 않나 싶다.
4,5월 날씨가 시원했다고 해서 어디에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시원하다고 모내기를 못 하는 건 아니고 농업에 대해 문외한이라 잘 모르지만
농작물이나 과수가 자라는데 지장을 주지도 않을 거 같다.
아무런 악영향을 미치지 않고 적당히 쌀쌀하고 초여름으로 넘어가면서도 덥지 않은 봄,
꿈에나 그릴 수 있었던 최상의 봄이었다.

다음 주부터는 절기상 여름이다.
어제부터 기온이 올라 오늘 낮에는 30도까지 올랐지만
내일부터는 다시 25도 이하로 내려가고 다음 주 화요일과 수요일에 걸쳐 비 소식도 있어
당분간 30도를 넘는 혹서 예보는 없다.
5월 초 영동지역에 갑자기 30도를 넘는 반짝 무더위가 찾아왔기 때문이었는지
삼척 바닷가에서 밤에 모기에 엄청 뜯겼지만 아직은 모기도 보이지 않는다.

여름 철 최고 기온 30도 이상이 되는 날이 열흘을 넘나 그렇지 않나를
혹서의 기준으로 삼는다고 한다.
그런데 금년에 다가올 여름은 30도를 넘을 날이 이십일도 더 되어
예년 보다 훨씬 더울 거라는 게 기상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그러나 앞으로 열흘 정도 그러니까 최소한 6월 중순으로 접어들 때까지는
30도에 육박하는 날이 없는 거로 예보되고 있다.

하지만 이왕이면 기상 전문가들의 예측을 보기 좋게 빗나가게 해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예측이 틀리거나 잘 모르는 불리한 입장에 처하면 무조건 들이대는
기상이변이 지속 돼 6월은 이 조시로 쭉 가고 7,8월에도 이상 저온 현상이 계속되어
지난 해 여름처럼 찜통더위 없이 여름을 날 수 있었으면 하는
다소 황당한 소원을 미리 빌어 본다.

연세들이 연세들이라 최근에 동기들이 이런저런 병치레를 하고 있거나
약간은 엄중한 병 진단을 받았거나 몇 달 죽도록 고생하다 겨우 회복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자주 들려온다.
개 중에는 심한 폐렴을 앓은 후 회복 되었거나 회복 중인 친구들도 있다.
폐렴이라면 우선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영철이도 사인이 폐렴이었고 철순이도 폐렴이었다.

당대 최고의 호주가이자 애주가인 동옥이 절친 연대 중 문어과 교수 유 중하는
금년 초 심부전증 진단을 받고 근신중이라고 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세월에 장사는 없다.
채욱이는 온 몸의 빠 마디가 다 쑤시고 걷기는커녕 일어나기도 힘들어 심한 몸살인 줄 알고
두문불출 두 달간 집에 틀어 박혀 자가 요양만 하고 있었는데
보다 못한 현역 약사인 마누라에 끌려 전문병원에서 정밀검사 받은 결과
류머치즘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받고 지난 두 주간 집중 처방약 복용 후 다행히 많이 호전되어
이제는 걷고 일상생활 하는데 불편은 없다고 하여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어찌 보면 이런 것들이 다 노환의 일종이지 않나 싶다.
나이 들며 우리 몸의 각종 기관의 작동 능력이 떨어지게 되어 있고
각종 순환기의 관도 노폐물이 끼거나 결석 등이 생겨 좁아지게 되어있고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도 반비례로 떨어지게 되어있다.
면역력이 떨어지면 예전에는 우스운 상대였던 별 볼일 없는 바이러스도
상대하기가 버거워진다.
수많은 종류의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각종 질병에 약해질 수밖에 없다.

미국 샌 호세에 거주하고 있는 재효가,
‘나이 먹는 게 두렵다. 노인들의 면역력을 강화시키는 방법은 없는가 보지?’
면역력을 강화시켜 모든 바이러스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게 바로 불로장생 하는 비법이다.
‘생로병사’
자연의 이치다.
연세가 칠십을 바라볼 때쯤 됐으니까 다들 슬슬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마음가짐을
가지셔야 할 때가 되었지 않나 싶다.
또한 이 나이가 되도록 생존해 있어서 자연의 이치에 따를 수 있는 거만이라도
다행으로 여기고 감사해야 하지 않나 싶다.
왜냐하면 병은커녕 늙어보지도 못하고 앞날에 대한 꿈도 제대로 꾸어보지도 못하고
초년에 비명횡사해 자연의 이치에 역행하는 억울한 죽음도 있기 때문이다.

30년 전 서른 두 살의 창창한 나이에 겨우 백일 지난 아들과
갓 스물 아홉 젊디젊은 부인을 두고 사고로 세상을 떠난
내가 제일 사랑하고 아꼈던 선경 후배 호성이의 기일이 5월 26일이라
30년 전 장례를 치르고 관을 묻으며 직계 후배 10명과 앞으로 10년간 적어도 10주기까지는
매년 5월 마지막 일요일에 호성이 묘에 참배하러 오기로 맹세하고 그 약속은 지켰지만
그 이후 오랜 세월 벼르기만 하고 호성이를 찾지 못하다가
3년 전에야 호성이 바로 위 사수와 둘이서나마 호성이 묘를 찾아 볼 수 있었다.

물론 5년 전 25주기에 맞춰 내 바로 밑 서열 녀석과 둘이서 찾아갔었지만
주변이 온통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난데없이 초등학교, 중학교도 들어서 있는 등
그야말로 상전벽해, 한가하던 산촌의 옛 모습은 간데없어 몇 번을 돌며 헤매다
진접 읍사무소도 찾아가고 동네 복덕방에도 물어봤지만 종내 위치를 못 찾고
허탕치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금년이 30주기라 일찌감치 지난 해 연말 모임에서 중론을 모아 금년 성묘 일정을 정했었다.
관례대로라면 5월 마지막 일요일인 31일로 정해야했으나 하필이면 말일이라
혹 뭐가 있을지 모른다며 만장일치로 그 전주 일요일인 5월 24일로 정했었다.
그런데 날이 가까워오자 한명씩 두명씩 그 날 참석할 수 없는 일이 생기기 시작해
나와 호성이 바로 위 사수만 남게 되었다.
호성이 사수는 호성이와 대학은 고대와 서울 상대로 갈렸지만
춘천 고 일 년 선후배 사이라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데다
부모님들이 이북에서 피난 온 같은 고향 출신이라 남한에 인척이 없는 부모님들끼리도
친분이 두터워 아주 어릴 때부터 형제처럼 지내는 등 둘 사이가 각별했었다.

그래서 마침 그날 비가 올 거라는 예보도 있고 해서 하루 앞 당겨
23일인 토요일로 변경했다고 공지 했으나
24일에 무슨 급한 일이 생겼다던 녀석들이 23일로 바꿨는데도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 형님, 벌써 세월이 한 30년 흐르다보니 직계 유족들도 잘 찾아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사실 자기 조상 묘도 제 때 찾아보지 못하는데 약속들은 쉽게 했지만
  어지간해서는 주말에 호성이 묘까지 오기가 뭐 할 겁니다. 너무 서운해 하지 마십시오.“

글쎄다. 그건 자신이 가진 마음이 문제지 구지 유족들과 비교할 수도 필요도 없는 거 같다.
생전에 망자와의 관계가 물론 중요하겠지만
그 이후도 쭉 그런 관계가 유지 될 거라고 기대하거나
그래야 되는 거로 가정해서는 안 되는 거 같다.
세월이 흐르며 다 변한다.
눈에 보이는 사물 뿐 만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 심경도 변하기 때문에
함부로 가정할 수도 짐작할 수도 없다.
‘믿는다, 믿어라 변치말자 누가 먼저 말했던가, 아아, 못 믿을 이내 심사‘ 란
옛 노래 가사처럼 지 자신도 너무 믿을 수가 없는데 하물며 남이랴.

호성이가 묻힌 곳 일대가 상전벽해가 되어 옛날의 기억만으로는 찾아 갈 수도 없게 되었고
생전의 호성이 모습도 가물가물해지고 봉분도 가족 묘지로 바뀌었고
비석에 새긴 글도 희미할 정도로 바래졌고
무엇보다 비석에 새겨진 호성이 친구들의 신변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거며
또한 당시 비석을 세운 선경 임직원들 중 아직 호성이를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 지도 의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어떻든 간에 호성이는 흐르는 세월에 관계없이
언제나 내 마음 속에 시퍼렇게 살아있다.

3년 전에 찾아가느라 애를 먹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1990년 호성이를 묻은 후 10년 동안 매년 5월 마지막 일요일이면
우리 멤버들과 가족들이 아침에 일찌감치 압구정동 우리 집에 집결했다 산소로 가서 참배하고
근처 토종닭 키우는 집에서 반주 곁들여 백숙으로 점심을 하고 애들은 산에서 뛰어 놀고
오후 느지막이 돌아오곤 하던 추억 또한 묻혀 있는 곳이다.  

비록 새긴 글자에 세월의 흔적이 배어있지만
묘지 우측에 선경 임직원 일동이 세운 비석도 그대로 서 있고
좌측의 호성이 친구들의 추모비도 그대로였지만 정면에 나지막한 비석이 하나 더 서 있었다.
금년 2월에 90세를 일기로 타계하신 호성이 아버님이 합장되어 있었다.

호성이에게 누님 한 분과 아래로 남동생이 있다.
호성이 누님이 소리 죽여 하염없이 흘리던 눈물과
동생이, ‘형, 이래도 되는 거야? 억울하지도 않아.’ 하고 울부짖던 모습이
아직도 귓전을 울리고 눈 감으면 목전에 생생하지만
장례 절차 내내 그리고 아들을 묻으면서도 핏발 선 눈으로 꿋꿋이 눈물을 삼키며
조문객들에게 일일이 예를 표시하던 아버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꽉 막힌 거 같이 답답하고 먹먹해진다.
그 아버님이 30년간 먼저 간 아들을 가슴에 품고 있다 아들 곁에 묻혔다.
우리는 연락을 못 받아 조문을 못 했지만 만감이 교차했다.

비석에 호성이 이름과 연대,
그 바로 밑에 아버님의 성함과 연대,
그리고 그 밑에 연대는 공란으로 둔 채 아직은 생존해 계시지만
치매로 아버님의 사망 소식도 모르고 계시다는 어머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준비해간 몇 가지 제수 거리로 안주 겸 점심 삼고 막걸리 두 어병 음복으로
호성이 성묘를 마치고 호성이 사수를 가까운 전철역으로 데려다 주고 안창에 도착하니
벌써 어둑어둑 어둠이 짙게 깔려 저녁 무렵이 지나고 있었다.
7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주말 서울 외곽 도로는 코로나의 영행을 전혀 받지 않았다.
명절 때만큼 체증이 심했다.

미리 연락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큰 조카는 숯불을 피우고 있었고
이미 점심 무렵에 내려와 주리를 틀고 있던 작은 조카 부부가 반색을 하며 맞아주었다.
93세 숙모님도 허리를 펴고 손을 내저으며 눈을 다 감고 활짝 웃음으로 맞아주었다.

‘왔구나, 차가 많이 막혔다며?’
숙모님은 귀가 어두워 말을 크게 해야 하는 외에
아픈 데나 불편한 데가 한 군데도 없으시다 고  한다.
바늘도 한 번에 꿰고 맨눈으로 아무리 작은 글씨도 다 읽을 수 있다.
TV, 뉴스, 시사프로를 경청하고 온갖 참견을 다 한다.

잠도 잘 주무셔 저녁 11시 도 되기 전에 잠자리에 들면 다음 날 아침 6시까지
기척도 않고 푹 주무신다.
내가 가면 큰 조카가 자기가 쓰는 문간방을 내주고 자기는 자기가 관리하고 있는
근처 캠핑장에서 자고 아침에 오곤 하는데
화장실을 가려면 안방 숙모님 잠자리 머리맡을 지나야 된다.

전날 저녁에는 언제나 조카들과  삼겹살 구워 청국장에 막걸리를 푸짐하게 마셔
자다가 두어 번은 화장실을 찾게 된다.
화장실에 들락거릴 때마다 숙모님이 깰까 뒤꿈치를 들고
화장실문도 소리 나지 않게 조심해서 열고 닫지만
숙모님은 미동도 않고 누울 때 자세 그대로 주무신다.

식사도 가리는 게 없이 세끼 다 챙겨 드시고
고기 드시는 양은 보통 장정 먹는 양과 맞먹을 정도다.
이번에도 좀 남겠지 하고 정량 4근을 가져갔는데 조카 둘, 조카며느리, 숙모님, 다섯이서
막걸리 5통과 함께 깨끗이 다 구워 먹고도 허기를 다 채우지 못해
숙모님을 포함한 식구들이 모두 큰 조카가 끓인 청국장으로 저녁밥도 먹었다.

‘얘, 의사도 놀래, 처음 봤대, 하하하.’
원주 시 지정 면 최고령으로 지자체로부터 이런 저런 혜택도 많이 받는다고 한다.

“ 저기 건너 편 석주네 있잖아.
  석주가 작년에 죽은 후 소를 기르지 않아 파리도 없고 모기도 없어.
  석주가 소를 스무 마리나 키웠으니 파리 모기가 들끓었었거든. “

야트막한 양철지붕 집 옆에 손바닥만 한 마당에 귀퉁이만 남겨두고 마당을 다 차지하는
널찍한 평상을 놓고 날이 좋으면 평상에서 생활을 한다.
평상 뒤쪽으로는 손바닥만 한 밭이 있고 집 앞으로도 차 한 대 겨우 다닐 수 있는
아스팔트 깔린 농로를 사이에 두고 손바닥만 한 밭이 또 있어 제수씨 생전에는
앞 뒤 밭에서 필요한 채소를 종류별로 재배 했었는데 지금은 잡초만 무성하다.

농로 전면으로는 숙모님이 강원도에서 제일 질 좋은 쌀이 나온다고 자랑하는
연안 김씨 종가 소유의 논이 펼쳐져 있고 논이 끝나는 지점에 뚝 길을 사이에 두고
밭이 강 따라 좁고 기다랗게 이어져 있다.
평상에 앉아 앞을 바라보면 논을 오른쪽 대각선으로 건너 농로 따라 몇 채 농가가 있고
맨 앞 가운데가 석주네 외양간이다.

“ 할머니도 참, 소 때문인가? 아직 날이 쌀쌀해 파리, 모기가 없지.
  곧 더워지면 들끓을 텐데.”

묵묵히 고기를 굽고 있던 큰 조카였다.
농가가 띄엄띄엄 드물고 마을이 산과 강을 끼고 있어서인지 온도가 서울보다 몇도 낮고
체감 온도는 그 보다 훨씬 차다.
5월 말인데도 밤에는 군불을 때야 한다.
여름이 늦게 시작하고 가을이 일찍 찾아온다.

같은 강원도이지만 대관령 넘어 영동과 영서는 기후도 다르고 풍습, 식생활이 너무 다르다.
우리가 흔히 인용하는 ‘더래요.’ 하는 강원도 사투리는
춘천, 영월, 원주, 정선 등 영서지방 사투리다.
속초, 강릉, 동해, 삼척 등 영동지방 말투는 이북 억양과 경상북도 북부 지방 말투와 닮았다.
영동지방에서는 대관령을 넘기보다 바닷길이 수월했고 영서지방에서도 대관령을 넘기보다
내륙으로 경기도, 충청북도와 교류하기가 편했기 때문이다.

대관령으로 인해 우리가 소싯적 배운 푄 바람인지 하는 기후 현상으로
영동지방은 겨울에 따뜻하고 눈이 많은 대신 여름에는 대구를 방불케 할 정도로
찜통더위가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기후 또한 경기 북부 지방과 비슷한 강원 영서 지방과 차이가 많다.

이미 캄캄해진 하늘아래 집안에서 줄을 끌어 낸 전기등 하나 밝히고
평상 위에 대충 상을 차리고 갓 숯불에 구운 고기에 막걸리를 들이키는데
집 앞 논에서 개구리가 옆 사람과 소곤거리며 이야기하면 소리가 묻혀 안 들릴 정도로
떼를 지어 우렁차게 울어댔다.  

“ 개구리가 저렇게 시끄러울 정도로 떼 창을 하는 거 정말 오랜 만에 들어보는 구나.”

숙모님이 친정으로 낙향한 후 안창으로 찾아다닌 지난 30여 년 동안 이맘 때,
즉 논에 물을 가득 채우고 모심기를 할 때 온 건 처음이었다.
항상 추석, 설, 명절이었고 그 외에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어쩌다 여름에 고기잡이하러 오곤 했을 때뿐이었다.

“ 숙부님, 개구리가 아니고 맹꽁이에요. ”

큰 조카다. ‘아, 그래?’ 사실 나는 맹꽁이와 개구리를 구별할 줄 모른다.

다음 날, 날이 밝자 농로, 논길 , 뚝 길 따라 한 바퀴 돌았다.
구름이 해를 두껍게 가리며 낮게 깔려 있었고 대기는 잔뜩 습기를 품고 있었지만
이슬이 동글동글 곧 떨어질 듯이 잔뜩 맺힌 풀들이 뚝방 길 따라 싱그러웠고
풀잎 끝을 누일까말까 슬금슬금 불어오는 이른 아침 서늘한 바람이
온 몸을 깨우며 청량한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돌아오는 길은 석주네 외양간을 지나치게 된다.
석주는 숙모님 친정 연안 김씨 조카뻘 되는 먼 친척으로 숙모님을 고모라고 불렀었다.
평생 농사짓고 소 먹이며 살았는데 일부러 찾아다니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우리보다 한두 살 연하라 오다가다 부딪치면 수줍어하며 어색해 하는 웃음을 짓고
‘사돈 형님 오셨습니까?’ 하고 먼저 인사를 건네곤 했었다.

텅 빈 외양간 앞에 한참을 서 있으려니까
석주의 햇볕에 그을린 구리 빛 건강한 얼굴과
씩 하게 웃던 선하디 선한 전형적인 농부의 모습이 떠오르며
애잔한 마음에 잠시 눈시울이 붉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집안으로 들어오자 바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간밤에 캠프장에서 잔 조카들이
비를 쫄딱 맞고 들이닥쳤다.
저녁에 남은 청국장과 몇 가지 싱싱한 푸성귀로 아침 식사를 하는데
양철 지붕위로 비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양철 지붕위로 비 쏟아지는 소리, 이것도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였다.

다음 주 주말에 해야 할 일이 있어 토요 살롱 건너뛰게 되어 미리 독자들의 양해를 구하고
토요 살롱 독자들 모두 보다 아름답고 보다 건강하고 보다 행복한 6월을 맞이하기 바라며,
2020.05.30. 송 종 호.




토요 살롱 303회 " 강원도 번개 여행 "
토요 살롱 301회 " 反 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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