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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호(2020-07-11 21:00:25, Hit : 43, Vote : 4
  토요 살롱 306회 " 추모사를 쓰다 보니 "

다행히 우려하던 바가 아직까지 현실화되지는 않고 있다.
금년 여름은 유례없이 더울 거라는 예보에 따라 아예 체념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상예보가 빗나가기를 바라는 한 가닥 미련에 찬물을 끼얹듯이
6월 초에 때 이르게 30도를 웃도는 더위가 찾아 와 대단히 실망을 하며
기어이 예보가 맞는구나 하고 긴긴 여름 내내 찜통 불볕더위를 각오했으나
6월은 물론 7월 들어서도 벌써 중순으로 넘어가고 있는데도 큰 더위가 없었고
앞으로 당분간 그러리라는 예보도 없다.

낮에는 물론 30도를 넘나드는 날이 며칠 있었으나 아침저녁으로 선선하고
특히 열대야가 나타나지 않아 낮에 더위쯤은 큰 불편이 아니었다.
새벽에는 한기가 들기도 해 홑이불이라도 옆에 끼고 있어야 한다.
게다가 비가 많은 양은 아니지만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 꼴로는 내려주고 있다.
다음 주부터는 본격적으로 장마 비가 내린다니까 조마조마 우려했던 마른장마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달은 이렇게 그럭저럭 열대야 없이 잘 넘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조심스런 기대도 해 볼 수 있을 거 같다.
미세먼지가 가끔 하늘을 덮기도 하지만 때마침 불어오는 동풍, 서풍으로
대기 정체가 오래가지 않고 보통 하루를 넘기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지난여름처럼 아주 쾌적하게 여름을 보내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거 같다.

그러고 보니까 다음 주 중반에 초복이 끼어 있다.
복날이라고 특별히 기억할 일도 무슨 특별한 이벤트도 없지만
그래도 기분 상 여름의 한가운데라는 느낌이 든다.
이달이 그렇게 지나가면 중복도 지난다.
기껏 더워야 8월 한 달이다.

그렇게 화려하게 정원과 길섶 곳곳을 장식하고 흰색부터 검붉은 색까지 형형색색
도도하고 육감적인 자태를 한껏 뽐내며 주먹만 한 크기로 탐스럽게 활짝 피었던 장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 떨어져 천덕꾸러기로 바닥에 뒹굴고
그나마 어쩌다 힘없이 달랑달랑 매달려 있는 장미송이들은 퇴색하고 윤기도 물기도 잃고
볼품없이 찌그러지고 쪼그라져 물거품처럼 덧없이 사라진 지난날 영광의 잔해 같아
보는 이로 하여금 지금은 사라져버린 옛 시절 열정을 떠올리게 하며 마음을 아리게 한다.

둔덕 윗 단을 노랗게 물들였던 금계국도 감쪽같이 사라졌고
아랫단의 하얀 개 망초도 초록 줄기와 이파리만 무성한 잡초더미가 되어버렸는데
그 사이 가운데 한 복판에 느닷없이 깨알이 박히듯 다닥다닥 송이를 이루고 있는
보라색 열매를 가운데 두고 사방 줄기 끝에 하늘색 산수 국이 아랑곳하지 않고
무성한 수풀 사이에 한 무더기 무심히 피어 있다.

장미를 대신하여 분홍색, 핑크색 페튜니아가 숲 길 연도를 독차지하고 있고
드문드문 샛노란 천수국과 주황색 천수국이 페튜니아의 일방적인 분홍, 연분홍, 핑크, 진홍,
붉은 계통 일색의 단조로움에 대조를 이루며 도드라지게 방점을 찍고 있다.
진 황색 베고니아를 노란 짧은 입 백일홍과 키가 한 뼘도 되지 않고 색깔도 노랗지만
꽃잎의 생김새가 코스모스와 똑 같은 노랑 코스모스가 줄을 바꾸며 둘러싸고 있고
그 곁으로 진분홍 채송화가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마침 불어오는 바람결에 하늘거리고 있다.

정원 화단의 반은 두 뼘 길이로 가지런히 잘 키운 연두색 대 싸리를 경계로
콩알크기 꽃잎이 앙증맞게 톡톡 튀어 나온 자주색 천일홍이 차지했고
나머지 반은 천수국과 페튜니아가 나눠 차지했다.
건너편 넝쿨 장미가 똬리를 틀고 올라간 목책 안 쪽으로 튤립이 지나간 자리는
노란색, 주황색 천수국과 꼿꼿이 선 줄기를 따라 보라색 꽃이 열매처럼 촘촘히 피어 있는
조개나물이 양분했다.

지나간 과거의 아픔이든 영광이든 그 자국이 희미해지며 새로운 사연으로 채워지듯이
화려하게 온 사방을 장식하던 장미가 지나간 자리를
비록 색깔이 그 만큼 자극적이고 선정적이지는 못하더라도
또한 모양새가 그렇게 풍성하고 탐스럽지는 못하더라도
다양한 종류의 꽃들이 다양한 색깔과 모양으로 새로운 조화를 이루며 메우고 있다.
길섶에는 봄에 살아남은 냉이가 뒤 늦게 피운 하얀 꽃도 간간히 보인다.

금년 들어서만 고인인 된 우리 동기 일곱 명의 추모사를 여덟 번에 걸쳐 써 올렸다.
이런 일을 미리 예고라도 하듯이
지난 1월 초 신우 회 신년 예배 때 구 자경 신우 회 담임 목사의 설교 제목이 ‘죽음’ 이었다.
신년 초라면 오히려 생명이 충만하고 희망적인 제목이어야 할 텐데 천만뜻밖이었다.
그러나 설교를 들으며 왜 구목사가 새해를 시작하는 년 초에
바로 받아들인다면 종말적일 수밖에 없는 그런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는지
그 뜻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기독교적인 해석은 그렇다 치고라도
우리 나이쯤 되면 이제 죽음이 우리 코앞에 와 있어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죽음과 친해질 때가 되었고
언제 닥치더라도 담담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조금은 진부한 격언 같은 충언은 이제는 자기 자신을 설득해야 하는 현실이 되었다.

지난번에 올린 영훈이 경우 정작 쓴 나야 영훈이와 평소 교분이 전무 했던 터라
용자들의 이야기를 정리정도 밖에 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무슨 감정이입이 있을 수 없었지만
반세기 인생을 얽히고설키며 사소한 일상까지도 함께 공유해 온 용자들의 슬픔과 상실감은
가히 충격적이었던 거 같았다.

추모사 말미에 올린 용혁과 용상이의 댓글을 읽고서야
당장에는 그 격정 때문에 차분히 제대로 글로 표현 할 수가 없었을 거로 이해할 수가 있었다.
용혁이의 댓글을 보면 얼마나 슬픔에 차 있는지
세상을 영훈이가 있던 세상과 가고 없는 세상, 둘로 나누었고
하루에 두 마디도 잘 하지 않는 과묵의 아이콘, 용상이는 줄곧 울고 있다고 했다.

영훈이 추모사를 올린 다음날 오후에 용혁이가 추모사를 잘 정리해줘 고맙다는
톡을 보내왔다.
사실 써 올려놓고도 용자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그냥 정리만 하여
무미건조하게 나열한 거에 지나지 않은 거 같아
이거 아무리 그래도 너무 성의 없이 썼다고 욕먹는 게 아닌가 하고
내심 노심초사하고 있던 참이었다.

용상이도 추모사 댓글 말미에, ‘종호야, 고맙다.’ 라고 해줘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지만
짧은 시간인데다 내가 영훈이와의 추억이 없다시피 해 함부로 아는 체 하거나 추측할 수도 없어
용자들로부터 몇 가지 주어들은 이야기밖에 쓸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뭔가 너무나 미진한 거 같은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용혁이는 자신의 예를 들며 글을 쓴다는 거 자체가 고통인데
그 중에서도 ‘추모사를 쓰는 거가 제일 힘 든다.’ 고들 한다고 했지만
추모사는 제목과 주제가 정해져 있고 내용이 이미 거의 다 들어나 있어
그 중에서 객관적인 사실을 토대로 고인의 특징을 가장 잘 들어내는 부분을 추려내
뼈대를 만들고 얼마나 성의를 가지고 감정이입을 하여 살을 붙이느냐에 따라
읽는 사람들에게 주는 감동의 정도가 정해지기 때문에
사실 쓰는 거 자체가 난제가 되지는 않는다.
이런 면에서 제목과 주제만 가지고 자신의 방법으로 내용을 붙여
독자들의 흥미를 끌고 설득하고 감동을 주어야 하는 경우나
아예 제목, 주제조차 없이 글을 써야 하는 경우와는 천지차이다.

그러나 고인과 가장 가까웠고 고인을 가장 잘 아는 유가족들과
친지, 친구들을 대상으로 쓰는 거라 혹 사실을 왜곡하거나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고인의 행적을 잘 나타내는 사실을 빠뜨리거나 고인의 명예를 본의 아니게 훼손하거나 하여
고인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또는 고인과 삶을 함께 하고 고인을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지나 않을까 또는 추모사라고 썼지만
고인의 일대기 내지 이력이나 나열한 무미건조한 연대기처럼 되지나 않을까가
항상 우려되는 부분이다.
그래서 써서 올려놓고도 걱정이 되고 노심초사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용상이가 올린 댓글 내용을 보면 영훈이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친구들 중
마지막으로 안부를 나눈 친구가 용상이었다. 그게 1월 이었다고 한다.
용자들 중에는 4,5년 전 기우가 라스베이거스에서 영훈이를 마지막으로 만났다고 한다.
아마 기우가 LA에서 하던 일을 접고
라스베이거스로 옮겨 새로운 일을 하고 있을 때였던 거 같다.

또한 영송이도 댓글을 올렸는데 그 댓글에 의하면
2011년 12월 뉴욕에서 용모 둘째 딸 혼사에 참석하고
영훈이 부부는 서울에서 날아 온, 재복이, 용혁이, 혼주인 용모를 태우고
애틀랜타 영훈 네로 갔다가 용모는 비행 편으로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고
영훈 네는 재복이, 용혁과 함께 영송이 만나러 앨라배마의 주도 몽고메리를
다녀왔다고 한다.

당시 영송이는 현대자동차 1차 협력업체 현지 사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뉴욕에서 결혼 식 이후의 용자들의 일정을 이미 들었었고
1년 후인 이듬 해 겨울에 3박 4일 일정으로 와이프와 영송 네 갔을 때
영송이 부부로부터 영훈 네 일행이 다녀 간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애틀랜타에서는 1990년 대 말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가 애틀랜타에 자리 잡고 있던
규성이도 만났다고 하는데 이후 규성이는 소식이 두절됐다.
규성이는 나와 성대를 같이 다녔었다.
규성이가 미국으로 떠난 후 나와도 연락이 끊겨 있었는데
이후 규성이의 애틀랜타 전화번호를 전해 받아 연락을 취해 봤으나 연락이 되지 않았고
가족이 애틀랜타에 있어 애틀랜타에 갈 때마다 규성이와 연락도 하고 만나기도 했다는
광석이도 연락이 안 된다고 했다.

이렇게 생사여부도 모르는 채 연락 두절인 동기들이 몇 십 명 된다고 한다.
이 참에 이런 동기들 명부를 작성하여 찾기 캠페인을 벌이면 어떨까 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세상사 단절하여 은둔해버린 경우야 구지 찾으러 다닐 필요가 없겠지만
그래도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최소한 연락처라도 알고 있던지
하다 못해 생사여부 정도라도 알고 있어야하지 않나 싶다.

영송이처럼 이렇게 나름 고인과 추억이 얽힌 친구들이 있기 마련이다.
별 무심하게 지내며 한참 세월이 흐르다 어느 날 느닷없이 부고를 받게 되면
그 제서야 지난 추억을 떠올리며 아쉬워도 하고 회한에 젖기도 하게 된다.
누구를 먼저 보내고 나면 아쉬움만 남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런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달래 보려고
고인과의 생전의 일들을 떠올리며 추모사를 쓰는 건데
어쩌다 보니까 지난 몇 년간 동기들 추모사는 내가 독점하여 쓰게 됐다.
글을 쓴다는 게 물론 성가시고 귀찮기 짝이 없는 일이다.

더구나 기억력도 그렇고 집중력도 그렇고 체력도 그렇고
칠십이 내일모래인 노인에게는 더더욱 내키지 않는 일이다.
게다가 잘 모르는 동기들은 가까웠던 동기들을 수소문해 이야기를 캐내야 한다.
그러고도 몇 시간을 자판기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자판을 두드리다 보면
목이고 허리고 손목이고 사지가 다 뻐근하고 눈도 게슴츠레해지고 눈앞이 뿌여진다.

하지만 누가 써 주면 좋겠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면 나라도 졸필의 창피를 무릅쓰더라도
경희궁에서 학창시절을 함께 한 고인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 되지 않나 라는 생각,
비록 재주 없는 미천한 글이지만 그래도 고인의 유가족들이나 친구, 친지들에게
다소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나름대로는 진정을 다해 마다하지 않고
게으름 피우지 않고 기꺼운 마음으로 쓰고 있다.

그래도 철순이 추모사를 쓴 다음 날 아침
철순이와 운명적으로 만난 영혼의 친구 순억이가 고맙다는 전화를 해 주고
영훈이 추모사를 올린 다음 날 용혁이가 고마움을 표시하며
영문학도답게, ‘ You made my day!' 라며 격려해주고
용상이가 댓글을 달아,
‘종호야, 고맙다.’ 라고 해 주니까 안도도 되고 일말의 보람도 느낀다.
그런데 주어들은 이야기만 정리했는데도
철순이 추모사는 오늘 현재까지 350회의 조회 수를 기록했고
영훈이 추모사도 조회 수가 100회를 넘었다. 놀라운 일이다.

금년 들어 동기 일곱 명의 추모사를 쓰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써야 돼? 앞으로 점점 회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질 텐데?’
물론 내가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가정 하에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추모사를 쓰는 이유가 기록을 남기자는 것과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 두 가지다.

이 두 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써는 거니까 기록이 필요 없고 위로가 되지 않는다면
구지 쓸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나이가 몇 살 정도면 이런 게 필요 없어질까?
기록을 남기고 위로가 필요한데는 그 바탕에 공통분모가 깔려 있다.
바로 남겨진 사람들이 품는 고인에 대한 ‘아쉬움’이다.

충분히 장수했다고 누구나 인정하는 나이에 타계하면 아쉬움이 남을 수가 없다.
지금 우리나이니까 아쉬움이 큰 거다.
그래서 기록을 남기고 싶고 위로가 필요하다.
우리가 몇 살 정도면 남겨진 사람들에게 이런 아쉬움이 없는 나이가 되는 걸까?
2020.07.11. 송 종 호.




토요 살롱 307회 " 觀 照 "
토요 살롱 305회 " 한 여자를 순정을 바쳐 사랑한 자유 영혼의 소유자, 영훈이의 명복을 빌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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