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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호(2020-08-08 22:27:54, Hit : 104, Vote : 8
  토요 살롱 309회 " B/C 와 A/C "

어제 새벽에 비가 좀 뿌리다 가랑비가 오락가락 하는 정도로 약해지는 바람에
비를 맞으며 혹시나 하고 나간 게 기대에 맞아 간만에 풀로 운동을 할 수 있었다.
지난 화요일 새벽에 잠깐 소강상태를 틈타 나갔다가 운동 끝 무렵에 갑자기 비가 쏟아져  
마무리 운동은 생략할 수밖에 없었지만 달리기 등 주요 운동은 다 할 수 있어서
이 번 주에는 그 와중에도 두 번은 운동을 할 수 있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구름 사이로 해가 삐쭉 보일 정도로 갠 날씨로 시작했지만
정오도 되기 전부터 비구름이 짙게 몰려오고 하늘이 낮게 깔리더니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해 오후 한 때 그치는 듯 했지만
저녁부터는 빗줄기가 점점 세 지고 있다.
토요일은 토요살롱을 쓰는데 하루를 몽땅 할애해야 해 보통 운동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토요일에 날도 좋고 공기도 깨끗하면 엄청 손해를 본 거 같아
약도 오르고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다.
특히 이렇게 궂은 날이 계속 되는 여름철에는 더더욱 그렇다.

예보에 의하면 마치 여태 틀린 예보에 대해 만회를 하려는지 심통을 부리려는지
장마가 다음 주말까지 계속되다 비가 그친 8월 중순부터 9월 초까지는
유례없는 찜통 늦더위가 닥칠 거라고 한다.
글쎄, 이번 여름 들어 기상청 예보가 맞은 적이 없어 별로 믿고 싶지는 않지만
그대로 들어맞는다고 하더라도 별로 겁도 안 난다.
이렇게 이번 여름은 근래 드물게 시원했던 지난 해 여름보다 더 시원하게
많은 비를 동반하며 지나갈 거 같다.

짧은 소매 와이셔츠에 여름 양복을 걸쳤으니까 아마 1980년 7월 초이었던 거 같다.
당시에는 일단 해외출장으로 비행기를 타게 되면 계절에 관계없이
김포공항 출국장에 나타날 때는 무조건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이어야 했다.
무더운 여름철에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지만 당연히 그래야 되는 줄 알았다.
그게 일종의 예{의라고 여겼던 거 같다.
오전 9시 30분 출발 방콕 행 비행기를 타러 새벽같이 집을 나섰는데
그날따라 비가 제법 많이 내리고 있었다.
동생과 명륜동 성대 앞에서 하숙을 하고 있을 때였다.
동생은 26회로 연대 영문과를 다니다 2학년 마친 후 입대하여
육군 포병으로 전방에 배치되어 만기 제대한 후 복학하여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하늘이 점점 더 컴컴해지며 빗줄기가 굵어지고 이따금씩 천둥도 치고 번개가 번쩍이는데도
대한항공 방콕 행 비행기는 정시에 이륙하였다.
비행기에 착석을 하면 장시간 밀폐된 의자에 갇혀 있어야 되는 무료를 달래기 위해
책을 펼쳐 드는 게 이미 습관이 되어 있을 때였다.

해외 출장이 잦아지며 나름 정한 몇 가지 규칙이 습관으로 정착된 거도
이맘 때 쯤 이었던 거 같다.
비행기를 타는 순간부터 돌아올 때까지 되도록 한식을 멀리하고
양식 또는 현지 전통음식으로 식사를 하고,
일부러라도 한국사람 만나지 않고, 가급적 영어, 또는 현지어로만 소통을 하고
돌아올 때까지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분량의 책을 가져가 틈나는 대로 독서를 하고
조깅복과 수영복을 반드시 지참하고 시간 날 때마다 형편에 따라 뛰던지, 수영하던지 하여
시차, 기후 등 환경변화에 따른 체력과 컨디션 저하를 막고
현지 거래처와 잦은 술자리에서 과음으로 인한 뒤탈을 최소화한다가 그 내용이었다.
당시에는 이슬람 국가를 제외하고는 가든 지 오던 지
손님이 오면 술판을 벌이는 게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무리 오지에서 장기출장을 하더라도
또는 짧은 기간에 시간이 아까워 야간 비행을 이용해 잠은 주로 기내에서 자며
여러 나라를 훑는 강행군을 하고 돌아오더라도 어디 축 나는 경우가 없었다.
오히려 더 멀쩡해서 돌아오곤 했다.

그 이후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국내든 해외든 어디로 여행을 떠나면 무박이 아닌 한
수영복과 조깅 복을 지참하고 전자책을 챙기고
현지의 전통 술을 즐기고 전통 맛 집을 찾아다니는 등
이렇게 오랫동안 길들여진 습관을 가급적 지키려고 하고 있다.

당시에는 기내에서 맥주 등 주류를 제한 없이 무료로 마실 수 있었기 때문에
책을 펼쳐두고 맥주를 시켜 마시다 졸리면 자고 깨면 읽고 마시다 자고를 반복했는데
그 날도 이륙하자마자 일찌감치 맥주 캔을 시켜 마시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지났을까.
맥주를 이미 두어 캔 마셔 알딸딸한데 기체가 심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급강하와 급상승뿐 아니라 옆으로도 흔들렸다.
처음에는 날씨 때문인 줄 알았다.
몇 번 그렇게 롤러코스터를 타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술이 확 깼다.
주위를 돌아보니 다들 앞 의자에 손을 얹고 뭐라고 소리를 지르듯이 입을 벌리고
눈이 휘둥그레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게 놀란 가슴으로 안절부절 못하며 급상승, 급강하를 할 때마다
여기저기서 참고 참았던 비명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마침내 기내방송이 나왔다.
기체가 많이 흔들리니 안전벨트를 죄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말아달라는 주의 외에
왜 그런지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그러면서 30여분을 더 비행을 한 거 같았는데 그 동안 아무 안내 방송이 없다가
기체가 흔들려서 그런지 그렇게 들어서 그런지 여승무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뜬금없이 기체고장으로 김포 공항으로 회항한다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방송을 하였다.

비명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성호를 긋는 사람, 벌써 눈물을 쏟는 사람도 있었다.
한 시간 반가량을 날아왔으니까 돌아가는데도 그만큼 걸린다는 거다.
곡예 비행하듯 급상승 급강하를 반복하는 한 시간 반 동안 졸아 오그라진 간은
열두 번도 더 떨어졌고 맥주를 마신 대다 설상가상으로 오금까지 저려와
터질 거 같은 방광을 부여잡고 허리를 제대로 펴지도 못한 채 쭈그리고
30년도 안 되는 짧은 인생이지만 태어나서부터 연대별로 떠오르는 모든 기억을
수백 번도 더 반복하며 지난 세월 후회도 하고 아쉬워도 하고 미안해하기도 하고
감사해하기도 하며 벼라 별 생각을 다하는데도 시간이 그렇게 더디게 흐를 수가 없었다.
눈을 감고 30년 세월을 몇 번이나 반복했는데도 시계를 보면 5분도 지나가지 않고 있었다.

서른도 안 된 나이에 죽음을 앞둔 그 상황에서 억울하다는 생각보다는
미안하다는 생각이 훨씬 앞섰었다.
서른하나에 열 살 맏이인 나를 비롯해 밑으로 두세 살 터울의 올망졸망한 아이 셋을 더 두고  
세 살 위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가 되어 온갖 세파를 겪은 어머니 생각에 제일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며칠이고 까무러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해
당시 거주지였던 대구에는 일가친척이 아무도 없어 아버지 영전을 나 홀로 지켜야했던 일,
남편을 잃은 지 3년 후인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초등학교 2학년이던 여동생을 잃자
식음을 전폐하고 울음으로 지 새던 어머니 모습이 떠올랐다.
남편을 잃었을 때나 여동생을 잃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충격과 불행을 당해야 할
어머니에게 너무 죄송하고 미안했다.
동생들에게도 미안했다.
아버지 얼굴도 기억 못하는 동생들은 내가 형이자 오빠이자 아버지 대신이었다.

김포공항 활주로에 무사 착륙하자 기내는 그야말로 일제 환호와 흥분의 도가니였다.
웃고 울고 남녀 누구 할 거 없이 닥치는 대로 악수하고 껴안으며 서로를 축하해 주고
누군가의 선도에 의해 고장 난 기체를 끌고 비행해준 조종사에게
그 순간만은 모두가 진심이 담긴 감사의 박수를 열렬히 쳐 주었을 뿐 아니라
조종사를 위한 만세 삼창도 마다하지 않았다.

탑승객들이 모두 김포공항 터미널의 빈 대기실로 안내받아 바꿔 타고 갈 비행기를 기다리는데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있는데도 아무런 안내 방송이 없었다.
새벽에 나와 아침을 걸렀는데다 기내에서도 맥주밖에 마신 게 없었지만
일반적인 경우라면 방금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한숨 돌린 터라
식욕은커녕 사흘 전에 먹은 거도 올라올 법도  했는데
염치없이 둔감해빠진 내 위장은 그런 사정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때가 됐으니 밥은 주겠지 하고 꼬르락 소리를 참고 있는데 오후 2시가 넘도록
공항 직원들과 항공사 직원들이 워키토키 들고 부산히 들락거리기만 하지
도통 밥 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 친구들은 지 배만 생각하나?’
큰 사고가 날 뻔 했으니 경황이 없을 수도 있겠다 싶었으나
오락거리 하나 없이 의자만 죽 배열되어 있는 골방 같은 좁은 대기실에 처박아 두고
변경된 탑승 안내는커녕 때가 지났는데도 밥 줄 생각도 않는데 짜증이 나지 않을 수가 없어
누구를 붙잡고 야단을 치나하고 주위를 살피던 중
바로 대기실 문 밖을 키가 크고 멀쑥하게 생긴 대한항공 직원이 워키토키를 입에 대고
뭐라고 떠들며 부리나케 지나가고 있는데 뜻밖에도 아는 얼굴이었다.
‘아니 광희 아니야?’
나는 광희가 대한항공에 입사한 줄 몰랐었다.

“ 광희야.” 큰 소리로 부르자 화들짝 놀라 눈을 똥그랗게 뜨고 뒤돌아봤다.

“어, 종호, 네가 여기 왠 일이야?”

“너희 비행기 타고 가다 죽는 줄 알았다. 도대체 언제 다시 출발하는지 방송도 없고.
그러나저러나 밥은 줘야 할 거 아니야.“
“아 그래? 우선 밥부터 보내줄게.”

그러고는 쏜살같이 사라지더니 얼마 안 있어 사람 수대로 도시락이 날아왔다.

결국 그 날 비행기를 못 타고 다음 날 타게 되었는데 그 때 잠깐 광희를 본 후
그 다음에 광희를 만난 게 2011년 LA에서 이었으니까 30여년 만이었다.
광희는 LA로 이민 갔고 내가 갔을 때는 LA에서 일식 스시 집을 두 곳이나 운영하느라
동기들과 골프 모임에도 참석 못하고 저녁 모임에도 못 와 늦은 저녁에 잠깐 만났었다.

그 이후 광희 소식은 구우 회 멤버들인 순업이와 정운이를 통해 이따금씩 들었었다.
광희가 오로지 고교 때 결성 된 9우회 친구들과 술 한잔하기 위해
일 년에 서너 번 2박 3일 일정으로 들락거린다고 했다.
2박이지만 기내에서 일박을 하니까 와서 술 마시고 하루 밤 자고 가는 거다.
대한항공에서 OB들에게 주는 혜택으로 그 정도는 무료 티켓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저러나 아무리 공짜라도 그렇지 자동차로 몇 시간 드라이브 거리도 쉽지가 않은데
친구들과 술 마시러 그 먼 길을 날아오는 광희의 친구들에 대한 우정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정운이나 순업이에게 수 년 전부터 광희 오면 나도 한번 불러달라고 졸랐지만
무슨 연유인지 이루어지지 않다가 지난 달 우리 동기 몇, 25회 몇 해서
일 년에 두어 번 부정기적으로 만나는 모임에서 중구난방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정운이가 광희가 귀국해 있는데 이번에는 코로나 등으로 좀 있다가
8월에나 돌아갈 거라고 해서 그럼 광희 돌아가기 전에 이번에는 꼭 보자고 윽박질러
정운이, 순업이, 광희, 나 이렇게 넷이서 정운이 단골 세꼬시 전문점에서 만나게 되었다.
LA 이후 9년 만에 광희를 만났고 졸업이후로 따지면
1980년 김포 공항에서의 우연한 조우를 포함해 세 번째 만남이었다.
더구나 광희와 술 한 잔 하는 자리는 처음이었다.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코로나 이야기가 빠질 수 없었는데,
코로나 후에 변한 새로운 풍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정운이가,
‘그래서 BC와 AC로 구분된다는 거 아니야’ 하기에,
‘그게 무슨 말이야?’ 물었더니,
‘Before corona 와 After corona' 라는 거지.’

지난 해 11월 초 흥수가 전화를 하여 흥수답지 않게 뭔가 어색하게 이것저것 안부를 물으며
잔뜩 뜸을 들이더니 다짜고짜 목소리에 잔득 무게를 싣고,
‘종호 니가 차기 신우 회장을 좀 맡아줘라.’
해 줄래?가 아니라 해라라는 어투에 단순히 의향을 묻는 게 아니라
무조건 맡아 달라는 절박함이 배어있었다. 현 회장은 흥남이었다.

사실 흥수로부터 그런 제안을 받은 게 처음은 아니었다.
지지난해 그러니까 흥남이가 2년 임기의 회장을 맡은 지 일 년도 채 안 된 11월 어느 날
‘자기가 건강도 안 좋고 하여 더 이상 회장 직 수행이 어려울 거 같으니
자기는 연말까지 일 년만 채울 테니까 다음해부터 바로 회장 직을 이어 달라. ‘ 고 하여
‘나는 일 년에 두 번 미국을 다녀 와 보통 반 정도 밖에 참석을 못하는데
어떻게 회장 직을 수행할 수 있겠냐.
더구나 가장 중요한 연말 송년회와 신년 첫 모임에  참석할 수가 없는데.
그런 면에서 나는 가장 부적합한 후보‘ 라는 이유를 들어 거절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흥수에게도 똑 같은 변명을 했더니 흥수는 이미 이에 대한 대비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다 알고 있는 사실이고.
그래서 말인데 니가 미국을 가거나 비즈니스 관계로 참석을 못 하게 되는 경우에는
내가 백업을 해줄게.‘
‘아니 너도 중국에 반은 가 있어야 되잖아?“
‘물론 그렇지만 나는 비교적 자유로우니까 니가 빌 때 여기 있는 걸로 조정하면 돼.’

더 이상 변명을 이어가거나 핑계거리를 찾는 게 민망스럽게 여겨졌다.
그러면서 한동 대 교수로 정년퇴직 후 모든 편의와 안락,
그리고 언제나 가까이에서 생을 함께 하고 싶은 세속의 모든 인연을 뒤로 하고
다가 올 불편과 고난과 외로움을 감내하며 오로지 선교의 목적으로
머나먼 오지 아프리카 탄자니아로 떠난 건웅이 부부가 떠올랐다.
‘그래, 알았다. 해 보자.’

내가 처음 신우 회 모임에 오 성진이 따라 간 게 2009년이었으니까 11년 전이다.
아주 어색하고 생소한 모임이었다. 우선 아는 얼굴이 별로 없었다.
같은 반을 한 친구들도 눈에 띄고 동기 회 모임에서 인사를 나눈 친구들도 더러 있었지만
자주 만나거나 친하게 지낸 친구는 없었다.
더욱이 신우 회 담임 목사인 구 자경 목사는 동기동창이지만 처음 대하는 얼굴이었다.
게다가 나를 가이드한 오 성진이가 한두 번 더 나오다가 모임이 소망교회의 사정으로
소망교회를 떠나 구 자경 목사가 담임목사였던 정릉교회로 옮기게 되자
진료 후 시간에 댈 수 없어 못 나오게 되는 바람에 나는 더더욱 꿔다 놓은 보리자루가 되어
일 년에 몇 번 사정이 허락할 때나 참석하여 회원들과의 친교는 거의 없이
조용히 설교만 듣고 돌아오곤 했었다.

구 자경 목사가 정릉 교회에서 신촌 창천 교회 담임 목사로 옮기면서
신우 회 모임도 따라 옮기는 동안 모이는 숫자가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강남 또는 강남이남 거주 회원들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교통이 가장 큰 애로 사항이었다.
그래서 구 자경 목사의 주선으로 교대 충신 교회로 또 장소를 옮겼으나
한번 줄어든 숫자는 좀체 회복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줄어 지난해 하반기에는 참석자가 열 명을 넘지 못할 때도 있었다.

신우 회는 20여 년 전에 결성되었고 2년 임기의 초대 회장이 이 종만, 그 다음이 육 동신,
그리고 김 흥수, 오 성진, 김 완진, 강 호철, 이 대성, 김 기선, 신 갑섭,
주 흥남이 나의 전임으로 뒤를 이었는데 이 중 기선이는 원래 내정됐던 수택이가
불가피한 사정으로 못 맡게 됨에 따라 유일하게 연임을 하였다.
최 종호가 초대 총무였고 그 다음이 한 권식, 이후 갑섭이가 총무로 오래 봉사하다가
회장이 되며 철홍이에게 물려줘 현재 철홍이가 3대 회장을 거치며 5년째 총무를 맡고 있다.

내가 회장을 맡은 후 다행히 참석인원이 늘어 다소 면목은 섰지만
3월 이후 코로나로 집회를 못하게 되는 뜻밖의 불상사가 발생하게 되었다.
3월에는 탄자니아에서 일시 귀국한 건웅이 환영 오찬 겸 번개 팅으로 열 두 명이 모여  
그런대로 정기모임을 가름할 수 있었지만 4월에 집회를 할 수 없었고
5월에 잠시 코로나가 주춤하는 바람에 소규모 집회가 허용되어  
가까스로 5월 정기모임 겸 기선이 추모 예배를 유가족이 전원 참석한 가운데 가질 수 있어
지금 돌이켜보면 그나마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후일담이지만 그 날 추모예배를 집도한 김 문일 목사의 감동적인 설교와
유가족을 대표한 출가한 기선이 딸의 절절한 추도사에 다들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날의 감동은 아마 유가족들에게는 물론 그 날 참석자 전원에게 앞으로 오랫동안
잘 잊혀 지지 않을 깊은 여운으로 남아 있지 않을까 싶다.

6월에는 모든 사정이 완화되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오히려 언제가 될지 앞일을 장담할 수 없게 되어 고심 끝에 전임 회장들을 초청하여
고견을 듣기로 하고 7월 4일에 모여 의견을 나눈 결과 여러 안이 개진된 끝에
영상예배를 보자는 거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 안을 구 목사에게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자
구 목사가 창천교회 영상 담당 부목사와 상의 결과 신우 회 명의의 밴드를 설치하여
회원들이 밴드에 가입하면 밴드를 매체로 동영상을 찍고 회원들은 핸드폰을 통해
라이브로 시청하는 방법이 가장 간편하다고 하여
곡절 끝에 재호가 새로 신우 회 밴드를 설치하고 회원들에게 가입을 권유하기 시작했다.
재호는 과연 몇 명이나 가입할까 우려했으나 결과적으로 당초 예상보다 훨씬 많은
63명의 회원이 가입하게 되었다.

이는 해외 거주 동기 크리스천들과 지방 거주 동기 크리스천들의 동참이 컸다.
동영상으로 제작되어 녹화되면 어디에서고 라이브로
또는 자기가 편한 시간에 녹화로 시청할 수 있기 때문에
지방 거주 동기들과 해외 거주 동기들에게 연락하여 동참을 권유한 결과였다.
뉴욕, 뉴저지는 순구가 중심이 되어 주었고
LA 는 범수가 그 지역 동기들에게 소식을 전해주었다.
디트로이트의 김 호중, 런던의 구 본극, 프랑크푸르트의 홍 재익,
뉴질랜드의 이 명학이 동참하였고 부산에 거주하는 이 의영, 이 천복,
속초에서, 김 희근, 장 영철, 이 수택이 참여하였고 경남 거창에서 김 의영,
인천에서는 최 영식이 참여하였다.

재호 왈,
‘코로나 땜에 신우 회가 글로벌화 되었네.’

원래 신우 회 정기 모임은 매월 두 번째 화요일인데 8월은 휴가철이라 쉬고
12월 두 번째 화요일은 송년 모임으로 대체한다.
구 자경 목사가 신우 회 창립 때부터 담임목사를 맡으며 주로 설교를 하고 있고
김 문일 목사와 김 성주 목사가 돌아가며 설교를 한다.
소망교회에서 모임을 가졌던 전성기 시절에도 참여 인원이 10여명의 부인들을 포함해서도
30여명 안 밖이었다.

7월 정기 모임은 14일이었으나 두 주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7월 28일 창천교회에서 첫 영상예배를 라이브로 방영하였는데
해외와 지방 거주 동기들을 포함해 60여명의 밴드 가입 회원과 그 가족들이
라이브로 또는 녹화로 예배에 동참할 수 있었다.
오프라인 예배 때보다 두 배도 더 많은 숫자다.
그리고 라이브 방영시간이 새벽3시 반인 LA 지역 동기 15명은
범수 외에 밴드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재호가 별도로 보내준 동영상으로 예배를 볼 수 있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예정이다.

방영 후 예배를 시청한 많은 동기들이 찬사와 감격의 뒷글을 올렸는데
예배를 마치자마자 뉴욕과 LA 등지에서 올리는 댓글에 설교를 마친 구 목사가
누구보다도 신기해하고 감격해했다.
‘뉴저지에서, LA에서 실시간 같이 예배를 보고 감상문을 올리다니, 세상에, 참.’

코로나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의영이의 뒷글이 재밌다.
‘맞아 죽을 소리지만 코로나가 고맙다.’

코로나로 인해 새로운 방법을 찾게 되었고 코로나가 진정되면
당연히 오프라인 예배가 주가 되겠지만 영상녹화를 병행하여
불가피한 사정으로 현장 예배를 볼 수 없는 회원들도 영상예배를 통해
예배에 동참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2020.08.08. 송 종 호.




토요 살롱 310회 " 비가 와도 울어대는 매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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