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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호(2021-04-24 21:16:42, Hit : 174, Vote : 62
  토요 살롱 321회 " 희소식이 아닌 무소식 "

주 초반까지만 해도 최저 기온이 7,8도에 머물고 낮에 최고 기온도 15도를 넘지 않아
봄이 여느 때보다 일찍 찾아와 벚 꽂이 일찌감치 피고 졌지만
4월 중순이 지나고 있는데도 대기가 차고 불어오는 바람도 쌀쌀해
특히 밤이 이슥한 귀가 길이면 깜깜한 밤, 주변 상가의 불이 다 꺼지고
길가의 가로등만 하얗게 비춰 사방이 더 적막하고 쓸쓸해서인지  
봄이랍시고 호기롭게 내의를 벗어 던진 맨살에  
가벼운 경장 한 겹을 뚫고 들어오는 밤바람이 차갑게만 느껴져
자기도 모르게 몸을 한 번씩 부르르 떨곤 했었는데
주 중반을 넘어서며 낮 기온이 20도를 넘기 시작해
따사로운 햇살 아래 무심히 걷다보면 어느 듯 이마에 살짝 땀도 번지고 몸도 열기로 후끈해져
춘추용 자켓이 묵직하게 끌어내리는 거 같아 어디 가서 자리를 잡게 되면  
거추장스러워진 자켓부터 벗 게 된다.

4월 초에 성묘 차 대구를 다녀왔을 때 대식이를 못 봤기 때문에 2주 후인 지난 주말에
대식이 만나러 KTX편으로 대구를 재차 다녀왔다.
2주 만에 대구를 재방문한 건 1968년 겨울에 짐이라곤 책가방 하나 달랑 옆구리에 끼고
외삼촌 따라 대구 역에서 저녁 8시에 출발해 영등 포역에 새벽 5시에 도착하는
경부선 야간 완행열차를 타고 상경한 이후 53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2년 전인 1966년 중1 여름 방학 때 서울에 살고 있던 선친 형제들과
막 결혼해 갓난아기를 두고 있던 막내 삼촌이 모시고 있던 친할머니 뵈러
처음으로 상경하여 여름을 서울에서 이집 저집 얻어 먹으며 다니며 보낸 이후
두 번째 상경 이였지만 서울이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시 외삼촌이 김포 양촌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김포 행 시외버스 첫차를 기다리면서
12월 초인데도 얼마나 추운지 날이 밝으려면 아직도 먼 깜깜한 새벽에
홑 교복 차림으로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입을 딱딱 부딪치며 덜덜 떨고 있는데
기다리는 버스는 언제 올지 기약도 없어
철없이 애꿎은 외삼촌을 타박하며 투덜거리던 기억을 떠올리면
다 큰 녀석이 그거 하나 못 참고 어린애처럼 투정부렸다는 창피한 생각에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고등학교와 대학 재학 중에는,
대구가 태어난 곳은 아니었지만 초등학교 2학년 올라오면서 영천에서 대구로 전학해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면서 아버지, 여동생, 외할머니를 차례로 여의는 곡절도 겪었지만
초등학교, 중학교 때 사귄 친구들과의 수많은 추억이 묻힌 고향과 마찬가지였기에
낯설고 물 설은 타향살이에다 혼자서 숙식과 학비를 해결하느라
지치거나 난관에 봉착했을 때는 언제나 다 팽개치고 달려가
기대어 의지하고 위로 받고 싶은 그리운 곳이었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시간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그럴 형편이 못 되었다.
어머니와 동생들, 대구 친구들이 보고 싶어 방학 때는 어떻게라도 내려가지만
그마저 거처할 곳이 마땅찮아 겨우 며칠 다녀오는 정도였다.

직장을 다니면서는 휴가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고 당시에는 토요일도 정상근무를 했고
일주일에 단 하루 휴일인 일요일도 회사 출근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
재학 때보다 오히려 더 대구를 다녀 올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해외에서 돌아 온 1989년 이후에야 비로소 마음이 내킬 때 언제나 갈 수 있었지만
언제든 갈 수 있다는 상황변화가 그리움이나 절박감을 희석시켜버렸는지
아니면 서울에서 고등학교,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며 서울에 더 많은 추억이 쌓이고
정도 더 들어 고향인 대구는 일 년에 두 번 가는 정도로 족해져버린 거였는지
어쨌든 무슨 규칙을 정한 게 아닌데 자연스럽게 성묘하러 일 년에 두 번 대구에 들리는 거가  스스로의 불문율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성묘 외에 대구를 다녀온 경우는 손꼽을 정도도 몇 번 되지 않는다.
혹 가다 무슨 일이 있어 남쪽 끝 어디 갔다 돌아오는 길에 일부러 경유하거나
해외에서 돌아 온 후 초기에 한두 번 대구에서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모임이 있어
내려간 게 전부였다.
그러니까 일부러 누구를 만나러 대구에 내려간 건 처음이었다.

남철이와 셋이서 남철이와 2주 전에 만났던 생고기 전문 ‘두산 일 번지’에서 다시 만났다.
‘두산 일 번지’는 남철이의 단골이었던 생고기집 ‘거기’ 로 옮기기 전에
대식이가 나를 처음 데리고 간 곳이다. 그게 20년 전쯤 일이다.
‘거기’가 문을 닫아 다시 오게 되었는데 건물을 옆에 새로 지어 옮겼지만 주인은 그대로다.
두 자매가 언니는 카운터를 맡고 동생은 주방 일을 한다.
남철이와 두 주 만에 다시 만나는 거도 처음 있는 일이다.

“대식아, 지난 30년간 대구에 내려오며 한 번도 너를 안 보고 간 적이 없는데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디 갔다 오는 길에 너 보러 일부러 오밤중에 들리기도 안 했나.“

“맞다. 니가 대구 오면서 나 안 보고 간 적 없었지.”

“그래서 다시 내려왔다 아이가. 너 보러. 니 술 한 잔 할 수 있나.”

“응, 그래, 오늘 한 잔 하자.”

5시 반에 만나 10시 반쯤 되자 대식이가 그만 가자고 해서 자리가 파해졌다.
발목 근방에 종기가 난 걸 방치했더니 통증이 너무 심해 우리 만나러 오기 전에
자기 손으로 째고 고름을 짜 냈다고 해서 ‘술 마시면 안 되는 거 아이가’ 했는데
의사인 스스로가 괜찮다고 해서 주거니 받거니 했는데 아무래도 불편했던 거 같았다.

다음 날 느지막이 일어나 대구 시 도시 지하철 편으로 대구의 가장 오래된 중심지인
중앙 통으로 나가 대구 내려오면 의례히 들리는 선지 따로 국밥 집에서
아침 겸 점심으로 선지 추가해서 푸짐하게 해장하고
미리 봐 둔 길 건너편 사거리 코너의 스타벅스에 자리를 잡았다.
일요일 아침이라선지 매장이 한산해 중앙 통 대로 변 창가의 4인용 널찍한 자리를
독차지할 수 있었다.
고향이나 다름없는 언제나 정겨운 땅 가장 번화한 시내 한 복판에서  
햇살이 따사로운 어느 봄날의 한가한 일요일 아침,
창 넓은 창가에 앉아 뜨거운 커피 한잔을  후후 불며
창밖을 오가는 젊은 남녀들의 밝고 경쾌한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립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아프기도 한
어린 시절 옛 추억에 젖기에 충분했다.

중앙 통은 중학교 다닐 때는 혼자든 우루루 몰려서든 뻑 하면 돌아다니던 곳이었다.
중학시절 애마였던 자전거를 타고 아침 일찌감치 나와 일부러 중앙 통을 가로질러
등교를 하기도 했고 하교 때는 친구들과 떼 지어 자전거로 시내를 질주하기도 했었다.
극장이 몰려 있어 학교를 빼먹고 조조할인 영화를 보러 다니던 곳이었다.
대학에 다니면서는 방학에 대구에 내려오면
친구들과 매일 저녁 중앙 통 뒷골목의 선술집으로 막걸리 마시러 다녔었다.
미리 약속을 할 필요가 없었다. 저녁에 거기 가면 누군가는 항상 만날 수 있었다.

그 이후 강산이 몇 번 바뀐다는 몇 십 년 동안 대구 변두리는 상전벽해가 되어
어디가 어딘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낯선 곳으로 변했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크게 변함이 없는 중앙 통을 대학 졸업 후 처음으로 걸어봤다.
그래서 추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대구에서 찻집에서 커피 마셔보는 것도
대학시절 다방 여 종업원 희롱하는 재미로 아무 맛대가리 없는 쓴 커피에 설탕 잔뜩 넣고
오만상 찌푸리며 커피 값이 아까워 그리고 무슨 폼 같지도 않은 폼 재느라
잔을 홀짝거려야했던 그 때 이후 처음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회상에 젖다 대식이에게 전화를 했다.

“ 어제 잘 들어갔나. 교회는 잘 다녀왔나. ”

“ 교회 못 갔다 아이가. 어제 통증 때문에 도저히 더 이상 못 앉아 있겠는 기라.
  그래서 그만 일어나자고 안 했나.
  집에도 겨우 와 가지고 너무 아파서 밤에 잠을 못 잤는 기라.
  아침에 도저히 못 걷겠어서 교회 못 갔다.
  지금 내내 집에서 소파에 발 올리고 그냥 있다. “

“ 야, 이 미련탱이야, 어제 술 마시지 말아야지 술이 기름 부어버린 거 아이가.
  내일은 니가 아무리 의사라도 다른 병원에 가서 째고 고름 다 들어내거라. “

“ 오야, 조심해서 잘 올라가거라.”

오늘 전화를 해 봤더니 다행히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다른 병원에 가지 않고 지가 째고 지가 들어냈다고 한다.

화무십일홍이라고 아침 햇살을 받아 초록 싱싱한 줄기는 새벽에 머금은 이슬이 구슬이 되어
보석처럼 반짝이고 윤기 반지르한 꽃잎은 잔뜩 오므리고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서서
아래로 내려오며 잘록 굴곡진 허리와 그 아래 탱탱한 엉덩이가 그토록 요염하던 튤립도
속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잎이 다 벌어지고 가장자리부터
메마르고  윤기도 없고 탄력도 잃은 시든 꽃잎이 하나둘 볼품없이 떨어지고 있다.
그토록 화려하던 튤립의 계절이 꿈같이 잠깐 사이에 지나가고 있다.

대신 진홍색, 연보라색, 주황색 철쭉이 만개하고
그 사이 사이에 하얀 개 벚이 도드라지며 둔덕과 산책길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풀 섶 안 양지바른 곳에는 자주색, 보라색 제비꽃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고
그 아래 나지막이 한 뼘 길이 줄기 위에 동전만한 노란 고들빼기 꽃이
때마침 불어오는 봄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다.

날도 부쩍 길어져 새벽 5시 반이면 어둠이 회색으로 바뀌며 사방이 훤해지고
동녘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다.
날이 길어지고 기온이 오르자 새벽 운동 객도 부쩍 늘었다.
몇 년 만에 보는 낯익은 모습도 있다.
마스크로 눈 아래 얼굴을 다 가리고 운동모자로 눈 위를 다 가리고
두꺼운 뿔 테 안경으로 눈까지 가려 안경 안으로 눈알만 겨우 들여다 볼 수 있어
머리칼 색깔이 얼마나 하애졌는지 숱이 얼마나 성겨졌는지,
그리고 얼굴에 주름이 얼마나 늘었는지는 가늠할 수 없었으나
그래도 체형이나 몸짓거리, 걸음걸이는 그대로라 누군지 금방 알아 볼 수 있다.

“ 안녕하셨어요?”

“아니 이게 누구야, 도대체 얼마만이야?  왜 그동안 통 안 보였어요?
너무 오래 안 보이기에 난 어디 멀리 이사 간 줄 알았지.”

“아, 예, 3년 만에 처음 나온 거 같아요. 몸이 안 좋아 요양 차 어디 멀리 좀 가 있었거든요.”

“아, 그랬군요, 많이 좋아지셨는가 보네요. 이제는 계속 나오겠네?”

“예, 그러려구요. 건강도 많이 회복됐구요. 그런데 어르신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세요.
몸이 더 좋아지신 거 같아요.“

“하하, 그럴 리가요. 세월이 좀 지났으니까 지금쯤 허리도 꼬부라지고
뛰기는커녕 지팡이 짚고 겨우 아장아장 걷고  머리도 백발에 숱도 몇 가닥 안 남고
얼굴도 쭈글쭈글해져 폭삭 늙었을 줄 지레 상상했을 텐데 그렇지는 않은가 보지요?“

“아이고 어르신도 참, 무슨 말씀을. 아, 뛰시는 거 보면 아직도 청년 같으세요.
그 연세에, 부럽습니다. 어디 아픈 데도 없으시잖아요?”

“그냥 오랫동안 하다보니까 습관이 돼서 새벽에 눈 뜨면 어지간해서는 나오게 되고
며칠 게으름 피우면 몸이 찌뿌둥해서 나오게 되고 나오면 그냥 걷는 건 무료해서 뛰게 되고.   그래도 나이는 속일 수 없잖아요?‘

이 사람은 나하고 비슷한 연배인 거 같은 데 내가 자기보다 대여섯 살 위인
70대 중반쯤 되는 걸로 알고 있다.

몇 년째 연락이 안 되는 친구들이 있고 최근 들어 연락이 안 되는 친구들도 있다.
대체로 전화기가 꺼져 있거나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주십시오.’ 라는
수신불가 자동응답이 되풀이 되고 있다.
당사자들과 나보다 훨씬 친했던 친구들에게 수소문 해 봤지만 다들 나하고 같은 입장들이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친소에 관계없이 문득 보고 싶은 얼굴들이 있다.
오래 알고 지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냥 스치며 만났을 뿐인데도 그 장면이 마음에 새겨져
불쑥 떠오르며 궁금하기도 하고 보고 싶기도 한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대체로 바로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보낸다.
연락처를 모르면 물어서라도 직접 전화를 한다.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까, 반가워하지 않으면 어떻하지?
에이, 자존심 상하게 내가 먼저 전화할 수는 없지‘ 이렇게 생각이 많아지며 전화를 주저하면 대체로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다음 기회는 없다.
특히 우리 나이에는 더더욱 그렇다.
모임이 줄어들고 누구나 모임에 잘 나가려고 하지 않아서
어디서 우연히 만날 기회도 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때 생겼던 감상이나 궁금증은 그냥 그대로 아무 의미 없이 소멸되고 만다.
그게 아까운 거다.
돈이 드는 거도 아니고 특별히 무슨 노력이 필요한 거도 아닌데
자기가 원하고 하고 싶은 일을 그렇게 허무하게 무산시키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야, 그 친구 잘 있어? 어떻게 지낸데?’
‘그 친구 어디 아프다던데 어떻데?’

‘궁금하면 니가 직접 물어 봐.’
라고 하면 ‘뭐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고.’
그런데 왜 궁금하고 알고 싶을까.

그래서 연락이 안 되면 나이가 나이인지라 걱정을 하게 된다.
좋은 일인데 전화를 안 받을 리가 없다.
물론 느닷없이 속세와 모든 인연을 끊고 자연인이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 아니기 십상이다.

“나 미국으로 이민 가기로 했어. 5월 16일 날 떠나.”

“아니, 갑자기 뚱딴지 같이 무슨 소리야? 여태 아무 소리 안하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하려고 한 거야. 라스베가스에 집도 구해 놨어.”

재호, 준호와 나, 이렇게 셋이서 몇 년 전부터 두어 달에 한번쯤 만나
점심식사를 같이하고 오후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 커피 한 잔 하는 소모임을 하고 있었다.

“부인도 같이 가는 거야? 이 나이에 무슨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내가 먼저 가서 집 정리 좀 하고 와이프는 7,8월에 와. 손자들 둘 데리고.
내가 기저질환이 있잖아. 여기 겨울이 너무 추워. 그래서 따뜻한 곳으로 가려고.
그리고 손자들이 초등학교4학년, 2학년인데 부모가 조기유학을 원하고 해서 겸사 겸사로.“

재호는 신우 회의 창립 멤버이자 핵심 기둥이다.
앞으로 못 볼 수도 있다니 허전하고 섭섭하지 않을 수가 없다.
9.11 10주년이 되던 2011년 겨울에는 버지니아 집에서 차를 끌고 5시간을 운전해
뉴욕에 와 있던 재호 부부를 만나 같이 점심도 하고 차도 마시고
재호 부부가 소유하고 있는 맨해튼 허드슨 강 동쪽 강변에 위치한 아파트도 구경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아주 즐겁게 하루를 같이 보낸 적도 있었다.
다 다음 주인 5월 초에 흥수, 수종이가 동행하여
속초로 당일치기 송별여행을 다녀오기로 했지만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던 친구가
이제는 기약이 없게 되어버렸으니 아쉬운 마음 금 할 수가 없다.

속초를 택한 이유는 희근이가 속초에서 변호사를 개업하고 있고
경희대를 정년퇴임한 영철이가 몇 해 전에 속초로 이주했고
외무부를 정년퇴임한 수택이도 몇 년 전 고향인 고성으로 낙향한데다
한해 휴학해 25회로 졸업했지만 서울 법대를 희근이와 같이 다닌 현익이가 속초에 거주하며
강원도에서 가장 큰 아스콘 공장을 운영하고 있어
오며 가며 스치고 지나가는 산과 바다의 아름다운 풍치를 눈요기도 할 겸
평소에는 만나보기 힘든 친구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희근이, 영철이, 수택이는 신우 회 멤버들이다.

재호 부부가 젊은 시절부터 미국에서 오래 살았고
최근까지도 매년 몇 달씩은 미국에서 보내 미국 생활이 누구보다 익숙하겠지만
아무쪼록 미국에 가서 잘 정착하고 항상 건강하고 평안하기를 기원할 따름이다.

다음 주는 또 근교에서 일박하는 일정이 있어 토요살롱 건너뛰게 됨을 양해 바라며,
2021.04.24. 송 종 호.




토요 살롱 322회 " 특별한 송별 여행 "
토요 살롱 320회 " 봄의 향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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