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송종호(2021-06-05 21:36:04, Hit : 202, Vote : 71
  토요 살롱 325회 " 영규를 떠나보내며 "

절기 상 이제 막 여름에 접어들었는데도 비가 장마철 우기처럼 시도 때도 없이 내리고 있다.
일주일에 두어 번씩은 내리고 있다.
공기가 나빠질라 하면 때마침 비가 내려 씻어준다.
비가 자주 오니까 비 오는 날에는 아침 기온이 14,5도에 머물러 새벽으로는 아직도 서늘하다.
비가 오지 않는 날도 낮 기온은 30도까지 올라간 날이 있지만
아침 기온이 20도를 넘은 날이 아직은 없다.
그래서 5월 중순 며칠 간 기온이 급상승할 때 달리기를 마치고 기구운동을 할라치면
시큼한 땀 냄새를 맡고 왔는지 어디선가 까맣게 떼 지어 몰려와 주변을 왱왱 멤 돌며
공포에 떨게 하던 산모기도 그 이후로 사라졌고
한참 골아 떨어져 자다가 갑자기 물린 데를 긁느라 새벽잠을 설치게 하던 집모기도
더 이상 오밤중에 괴롭히지 않고 있다.

내 기억에는 거의 매해 봄마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가뭄으로 저수지 바닥이 들어나고
논바닥이 쩍쩍 갈려져 모내기를 못해 발을 구르며 안타까이 하늘만 쳐다보는
농민들의 근심어린 표정이 더더욱 깊이 패여 보이는 주름과 함께
봄의 대표 상으로 남아 있는데 그런 고정관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금년 봄처럼 이렇게 비가 많았던 봄은 거의 처음이지 않나 싶다.

비가 너무 와 오히려 병충해를 걱정한다고 하는데 나의 짧은 지식과 소견이지만
우리처럼 물이 모자라 모판에 모를 키워 논으로 옮겨 심지 않고
매일 비가 쏟아져 논에다 볍씨를 바로 뿌리고 모가 물속에서 자라 벼가 되게 내버려두는
동남아시아나 서남아시아, 열대, 아열대의 벼농사 경우를 보면 그건 기우가 아닌가 싶다.

영규가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3주가 지났다.
그 날이 스승의 날인 5월 15일, 토요일이었는데 이른 아침부터 비 예보가 있어
평소보다 좀 더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서 서둘러 옥외 운동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매일 아침 루틴으로 하는 청소, 실내에서 하는 상체 운동, 샤워, 아침 식사, 설거지 등을
부지런히 순서대로 마치고 9시 좀 지나 커피 한잔 진하게 타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토요일에 다른 일정이 있으면 토요살롱을 쓸 수 없으니까
전날 술을 마시지 않고 날도 좋고 공기도 맑으면 의례히 새벽에 운동을 나가지만
토요살롱을 쓰는 날에 새벽 5시부터 2시간 운동하고 나면
머리에 있는 신경까지 육체로 내려가 그렇지 않아도 특별나지 않은 평범한 머리에
글재주도 신통치 않아 컨디션이 좋을 때도 머리를 쥐어짜내야 하는 마당에
머리가 텅 비어 졸리기만 하고 뭘 기억하고 문장을 꾸미고 하는데 집중도 안 돼
새벽 운동을 나가지 않고 대신 그 시간만큼 잠을 더 잔다.

글을 잘 못 쓰는 사람이 글을 쓰면 체력이 엄청 소모 된다.
금방 피로가 몰려온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일 거다.
늘 하던 일이거나 잘 하는 일은 아무리 시간을 들이고 노력을 들여도 힘들기는커녕
오히려 할수록 신이 나고 즐기게 되는데
반대의 경우는 조금만 해도 짜증이 나고 힘들고 순간순간이 고역이 된다.
그래서 토요살롱을 쓰는 토요일은 충분한 수면으로 몸의 피로 도를 최소화시키고
모든 근심, 걱정거리를 머리 안에 정지시켜 심신이 최상의 컨디션 상태가 되도록 노력한다.

하지만 전전날인 목요일 저녁에 세무사 의동생 녀석, 영식이와 셋이서 오랜만에 만나
거나하게 한잔 하는 바람에 늦잠을 자느라 금요일에 운동을 못 한 데다
토요일 오전에 시작하는 비가 월요일 아침까지 2박 3일간 장거리로 내릴 거라는 예보가 있어
토요일 운동을 못 하면 연속 4일을 쉬어야 해 다소 무리를 감수하고도 새벽운동을 나갔었다.

이 셋에 인천에서 시중은행 지점장으로 재직 중인 50대 초반인 막내를 합해 넷이서
모임을 가진 지도 꽤 됐다.
세무사 녀석과 인연을 맺은 지는 그 녀석이 아직 국세청에 근무할 때인 90년대 중반부터니까 25,6년쯤 되었고 막내 지점장과는 2000년대 중반부터로 16,7년 되었으니
영식이를 더해 넷이서 부정기적으로 저녁에 만나 소주 한 잔 한 지도 족히 10년은 넘었다.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었다가 나로 인해 모임을 가지게 되었는데
세월이 흐르고 만나는 회수가 쌓이다보니까 호칭이, 변호사, 세무사, 지점장에서
자연스럽게  형님, 아우로 바뀌고
언제부턴가는 필요할 때 나를 거치지 않고도 스스럼없이 찾게 되는 사이들이 되었다.

공통점이라면 서로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다는 것과 주량에는 차이가 있지만
다들 한잔 하는 걸 즐긴다는 거 정도라고 할까.
정치적 성향은 나를 제외하고 셋 다 보수 꼴통에 가깝다.
그래서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관전자 신세가 된 나를 완전히 도외시하고
셋이 의기투합하여 거품을 물다시피 신나게 떠들어댄다.
그렇게 즐거워 할 수가 없다.
내가 뭐라고 끼어들라치면, ‘아, 형님은 가만히 계세요.’ 하며 발언 자체를
원천 봉쇄시켜 버린다.

코로나 이후로는 음식점들이 일찍 문을 닫는 바람에 마시는 속도가 빨라져
같은 양을 마셔도 취기가 더 오른다.
지난해 11월에 만나고 6개월이나 모임을 못 가져 무조건 날부터 정하였는데
지점장 막내는 그날 갑자기 지방출장을 가야 해 참석하지 못 하였다.

토요살롱 제목도 미리 정했고 쓸 내용도 대충 머리에 정리해 뒀지만
오전 내 컴퓨터 앞에서 그나마 텅 비어버린 머리를 쥐어짜내다 보니까
눈이 침침해지고 눈앞이 어른거려 엉덩이를 떼고 환기도 할 겸 베란다 이중창을 여니
빗물 통을 후드득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제법 굵은 빗줄기가 창밖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몇 줄 쓰지도 못했는데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벌써 정오가 지나고 있었다.
점심을 뭐 먹을까 잠시 고민하다 그런 망설임을 가장 빨리 해소시키는
가장 편하고 손쉬운 방법인 라면 한 봉지를 뜯었다.

식사 후 커피 한잔 더 진하게 타 마시며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의자에 앉은 채 잠시 눈을 붙이고 다시 컴퓨터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다 졸다 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때가 되어 허리 좀 펴고 대충 저녁 먹은 후 TV 좀 보다 다시 PC 앞에 앉아
토요살롱 마무리 짓고 원고를 우리 홈피 3군데에 다 올리고 나니까 밤 10시가 넘고 있었다.

그러고서야 핸드폰을 여니까 총무 대진이로부터 부고 두 개가 와 있었다.
오전에 영규 부고를 보냈고 저녁에는 영어 선생님이자 5반 담임 선생님이셨던
안 규 선생님의 부고였다.

안 규 선생님의 부고는 선생님의 연세도 있으신 데다 졸업 후로는 3년 전 12월 초에
기수, 정규, 수종 등 3학년 5반 반원들과 명구 나 이렇게 다섯 명이 5반의 부반장이었고
5반 모임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는 봉재 만나러 문경에 가서 봉재 농막에서 일박하며
한참 취중에 봉재가 안 규 선생님께 전화를 해 우리들 만남을 선생님께 보고 하던 중
갑자기 5반 출신도 아닌 나한테 바꿔 주는 바람에
얼떨결에 선생님과 통화를 하게 된 게 선생님과의 추억의 전부인 나로서는
고교시절 강의를 하던 선생님의 아련한 모습과 마지막 통화 때의 말씀과 억양만이 남아
그렇게 비통하고 절절한 마음이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선생님과 통화할 때 연세가 연세이신지라 쇳소리가 섞였지만
그래도 50여 년 전과 변함없이 충청도 억양이 배어 있는 중저음에  
강의하실 때처럼 단어 하나하나 또렷하고 느릿하게 발음하시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너무나 뜻밖이었다.

“ 선생님이 시종 고개를 들고 천장을 보고 강의를 하셔서
  선생님 수업시간에는 맘 놓고 잠을 잘 수 있어 선생님 인기가 최고였습니다. “

“ 내가 그랬던가? 자네 담임선생님이 누구였지?
  자네가 내 반은 아니었지만 자네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네.”

선생님의 연세가 95,6세는 되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나중에 봉재에게 물어봤더니
향년 92세셨다고 한다.
봉재가 스승의 날이라 선생님께 카네이션을 보냈는데 그러고 몇 시간 만에 부고를 받았다며
‘ 무슨 이런 경우가 있냐.’ 며 침통한 목소리로 어이 없어했다.

그러나 영규의 부고를 접하는 순간 확 다가오는 느낌은 판이하게 달랐다.
우선은 갑자기 찬바람이 속속들이 훑듯이 마음이 싸하고 덜컥 가라앉았다.
금년 들어 처음 접하는 동기 부고라 그만큼 잊어먹고 있었었다.
지난해 일곱 명이나 떠나보냈기에 최소한 금년은 그런 일 없이 지나가는가 보다 했었다.
그것도 5월까지였지 6월 이후 거의 일 년 간 더 이상의 동기 부고는 없었다.

생전의 영규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나는 학교 다닐 때 오다가다 지나쳤을 수는 있었겠지만
영규와 만난 적도 안면을 튼 적도 없었다.
나는 타교생에다 불어에 문과 반이었고 영규는 본교생이지만 독어에 이과 반이었으니까
서클을 같이 하거나 무슨 우연이 없는 한 만날 일도 안면을 틀 일도 없을 수밖에.
그러다 영규를 처음 만나고 알게 된 건 졸업하고 20여년도 더 지난
희근이가 동기 회 회장을 맡은 90년대 중반이었다.

어느 날 희근이가 회사로 전화를 했다. 당시는 삐삐를 차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희근이와는  같은 문과였지만 불어와 독어로 나뉘어 한 번도 같은 반을 한 적이 없는데다
사회에서도 서로 얽히는 일이 없어 오다가다 만나면 그저 반갑게 인사 정도 나누는 사이였지
그 때까지 한 번도 식사를 하거나 술을 하거나 하다못해 차 한 잔 나누는
사적 모임을 가져 본 적이 없는 그저 그런 사이었다.
고법 부장판사직을 그만두고 변호사 개업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던 터였다.
‘희근이가 어인 일로?’

“어이구, 영감님이 전화를 다 주시고. 설마 내가 뭐 잘 못한 게 있는 건 아니겠지?”

“하하, 그런 일이야 있을 수가 없지.
그런데 무슨 일이냐 하면 내가 이 번에 동기 회장을 맡았는데 수고스럽겠지만
니가 부회장을 좀 맡아 줘라. 영식이한테도 부탁해서 승낙을 받았어.“

영식이가 승낙했다는 말에 더 이상 토를 달 수 없었다.
그리고 회장단 상견례 하는 날 영규를 처음 만났다.
약간 호리호리한 체격에 얼굴이 길쭉한 말상으로 코가 크고 눈썹이 짙고
몽고계 인종으로는 보기 드물게 쌍까풀이 두텁고 눈망울이 큰 부리부리 한 두 눈에
머리숱이 새까만 데다 올이 굵고 빳빳하고 숱이 풍성한 정력적인 모습에
얼굴의 혈색이 불그레하고 시종일관 싱글거려, 말하자면 남자답게 잘 생겨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인상이었다.
기영이가 총무를 맡고 있었고 영규는 영신이, 영식이, 나와 함께 부회장의 일원이었다.

희근이가 회장이던 90년대 초, 중반은 우리 나이 40대 초라 한 참 혈기 왕성하던 때로
사회적 활동이 가장 바쁜 시기였기에 전원이 참석할 수 있는 날짜를 정하기도 쉽지 않아
임원진들이 자주 만나지는 못 했던 거 같다.
또한 당시 동기회는 일 년에 한 번 연말 송년 모임 겸 총회가 유일한 단체 행사였기에
동기회 임원들이 만나서 무슨 의제를 논하거나 의사를 결정하거나 뭐 딱히 할 일이 없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져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희근이 재임 2년 동안 일 년에 두 어 번꼴로 서너 번 모임을 가졌던 거 같다.
점심시간에 만나 점심을 하는 동안 한담을 나누다 바로 헤어지곤 했던 거 같고
첫 모임에 임원 전원이 모인 이후로는 그나마 전원 참석은 없었던 거 같다.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일로는 희근이가 차제에 동기 회 회칙을 제대로 만들자고 하여
항목마다 토론을 거쳐 기존의 동기회 회칙을 수정하고 보완해
지금의 동기회 회칙의 근간을 만든 거 정도라고나 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임원들 중 술 좋아하는 친구들이 핑계로 몇 번 술자리를 하기도 했는데
희근이, 영식이 내가 단골 멤버였었고 영규는 빠짐없이 참석했지만 일찍 자리를 뜨거나
느지막이 잠깐 얼굴만 비치곤 해 술자리에서의 에피소드도 별로 기억나는 게 없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영규는 체질에 맞지 않아 술을 입에 대지도 못 한다고 했다.
따라서 희근이가 동기 회장 시절 2년 동안 같이 부회장으로 재임했지만
서로 안면을 튼 정도 외에 영규와의 추억거리나 에피소드는 없다고 해야 할 거 같다.

그 때 영규로부터 직접 듣지는 않았지만 들리는 바로는 영규가 조명 사업을 일찍 시작해
이미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했었다.
그러다 희근이 임기가 끝나면서 연말 송년회 때나 어쩌다 마주치며 인사나 나룰까
다시 만나지 못하면서 까맣게 잊고 지내다 다시 영규 소식을 들은 건
그로부터 10년도 더 지난 2000년대 중반 당시 극동건설의 자재부장을 거쳐
포항 현장의 관리부장으로 재직하던 지철이로부터였다.
영규가 아마 극동건설 현장에 조명 하도급 공사를 맡았던 거 같았는데
그냥 흘려들어 자세한 이야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고 또 다시 잊고 지내고 있었는데 우연히 어디 동기들 모임에서
영규가 뇌출혈인가로 수술하였지만 다행히 경과가 좋아 회복 중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런 후 영규를 만난 건 7,8년 전 동문 가족사랑 마라톤 대회가 열린 잠실에서였다.
영규가 느닷없이 늘씬한 키에 귀공자 타입으로 잘 생긴 훈남 아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나는 2010년부터 시작한 동문 가족 마라톤 대회에 3회째인 2012년부터 참가하기 시작하여
하프 마라톤 종목이 빠진 2017년 8회 대회를 제외하고
2019년까지 매년 동문 가족사랑 마라톤 대회에 참석하여 하프 마라톤 종목에 출전했었다.
지난해와 금년은 코로나로 대회 자체가 취소되었다.

하프 마라톤 출전 선수들은 가장 먼저 아침 8시 반에 대회장에 도착하여 옷 갈아입고
백넘버를 받아 부착하는 등 준비를 마치고 9시에 집결하여 단체로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 후
9시 30분에 출발한다.
12시쯤에는 하프를 뛴 동문들도 다 들어와 주최 측에서 마련한 막걸리, 생맥주등 주류,
음료수, 간단한 안주, 국밥 같은 걸로 점심식사를 하고 이어 경품추천을 하는데
영규가 이 무렵에 아들과 함께 대회장에 나타났다.

걸음걸이가 좀 불편해보이고 말이 좀 어눌했지 평소의 모습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쑥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들을 옆에 끼다시피 하고 연신 싱글거리며
대회에 참가한 동기들과 일일이 힘주어 악수를 하고 인사말을 나누었다.
동기들도 영규가 수술을 하고 병석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비교적 건강한 모습으로 그것도 예고도 없이 불시에 나타나자
반가운 마음에 다투어 손을 잡고 한마디씩 덕담을 건넸다.

“어, 종호, 오랜만이구나. 잘 지내지?”

‘우리 아들이야.’ 하고 이빨을 다 드러내고 천진할 정도로 환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보였다.

동문가족사랑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는 동기들은 참가자가 거의 고정이 되어 있는데다
그 숫자가 매년 줄고 있어 매년 ‘누구는 오고 누구는 안 왔네?’ 하고 꿸 정도로
참가자 면면은 다 욀 정도였다.  
그런데 영규는 그 날 2010년 대회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대회장에 왔다.

그래서 영규가 대회 참가라기보다 수술하고 병석에 있다 회복이 되어
‘오랜만에 친구들도 만나고 친구들에게 자신의 건재한 모습을 보이러 왔구나.’
라고 생각했었는데 친구들에게 아들을 소개하는 모습을 보고는,
‘아니 이 친구가 아들 자랑하러 온 거 아니야?’ 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보다도 아빠가 가잔다고 따라 나와 준 아들이 더 대견스러웠다.
물론 거동이 아직도 불편한 아빠가 나들이를 한다니까 걱정도 됐겠지만
그렇다면 아빠가 어디 가는 거 자체를 만류했어야 할 텐데
장성한 녀석이 아빠 동문 모임에 가잔다고 따라나서지는 않는다.
명칭이 가족사랑 마라톤 대회라 가족 동반은 대환영이지만 부부동반은 몰라도
여태 장성한 자녀를 동반한 경우는 없었다.
윤재가 딸과 손자, 손녀들 데리고 온 적은 있는데 손자 보기가 목적이었다.
부부동반마저 해마다 그 숫자가 줄더니 급기야 2019년에는 커플 참석이 제로였다.

내가 우리 큰 녀석이 잠시 귀국했을 때 두 번 같이 하프마라톤을 뛰었는데
그게 아마 유일한 경우였을 것이다.
‘칠순을 바라보는 아빠가 하프를 뛴다니까 걱정이 돼서.’ 가 그녀석의 변이었다.

어쨌든 그 때 영규부자를 보고 느낀 감정은,
‘영규가 아들을 끔찍하게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구나.’
‘아들이 끔찍하게 아빠를 염려하고 위하는구나.’
‘부자의 정이 끔찍하게 깊고 두텁구나.’ 였다.

몇 년 전 매년 가을에 용배가 주관하여 우리 동기 가을 행사를 대신하는 음악회에서  
음악회를 마치고 저녁 식사자리에서 영규 부인을 먼발치에서나마 처음으로 본 적이 있었다.
영규는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거동을 할 수 없어 부인이 혼자 참석하였다고 했다.
항상 미소가 떠나지 않는 서글서글하고 복스러운 표정에
전체가 둥글둥글해 후덕하고 넉넉하고 너그러운 인상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첫 눈에 ‘대가 집 맏며느리’를 떠올릴 모습이었다.

부인이 많은 동기들로부터 인사를 받고 인사를 나누는 걸 보니까
오지랖 넓은 영규가 우리 동기 각종 모임에 부인과 동반한 경우가 많았고
또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나중에 부인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 내용이 한 결 같았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영규는 복도 많은 놈이야. 그런 마누라가 어디 있어,’
나의 개인 소견으로는 ‘사랑이 없으면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다.’ 이다.

‘영규는 생전에 부인으로부터 지고지순한 사랑을 받았고 그런 사랑을 받을 만큼
영규도 부인을 극진히 사랑했다.‘ 로 정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토록 사랑했고 삶의 기둥이었던 남편과 아빠를 떠나보낸 부인, 두 딸과 아들에게
진심으로 위로의 말을 전하고자 한다.

우리 곁을 먼저 떠난 영규의 명복을 빌며,
2021.06.05. 송 종 호.




토요 살롱 326회 " 두번째 맞는 코로나 여름 "
토요 살롱 324회 " 의리와 자존심의 사나이 고 박 영 규를 추모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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