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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호(2022-02-13 14:15:04, Hit : 195, Vote : 57
  토요 살롱 344회 " 黑蛇, 趙 惠 仁 "

혜인이 빈소를 차린 다음날 아침 10시 조금 넘은 이른 시간에 성 연철이 조문하러 왔다.
그 전에는 성 연철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기가 있는 지도 모르고 있다가 2014년 12월 초,
혜인이 모친 상 때 초면 인사를 나눈 후 7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두 번째 만남이었다.
머리털은 완전히 백발이 되었고 널찍한 이마를 가로지르던 두 줄기 주름은 더 패었지만
정겨운 눈웃음을 동반한 상시 웃는 표정에 두툼한 볼의 불그스레한 혈색은 그대로였다.
조문을 마치고 혜인이 부인과 인사를 나눈 후에야  옆에 서 있는 나를 알아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 놀라움과 반가움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내뱉는 첫 마디가,

“어, 송 종호. 야, 그런데 넌 왜 그렇게 늙었냐. 몇 년 사이에 폭삭 늙었구나.”

얼굴을 멀리 떨어뜨렸다가 가까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원근을 바꿔가며
자세히 들여다보는가 하면
혹시 잘 못 보고 있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째려보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마에 굵은 주름이 선명하도록 동공을 확대하기를 번갈아하며 연신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도 그럴게 연철이가 나를 마지막 본 2014년에는 아직 염색을 하고 있을 때라
새까만 머리를 하고 있어 아마 어쩌다 나를 연상할 때는
‘송 종호’ 걔는 얼굴은 쭈글쭈글 늙었는데 머리털은 희한하게도 까매.‘ 했을 텐데
뜻밖에도 백발을 하고 있으니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늘 자주 대하는 친구나 친지들에게는 ‘송 종호는 나이보다 열 살은 더 보인다.’ 로
소년시절부터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머리털 색깔 하나로 이미지가 절대 바꿔지지 않았다.
그래서 염색을 해도 다들 덤덤했다.
가까운 친구들 중에는 얼마나 무심한 지 심지어 염색한 거를 알아채지 못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중에 알아도, ‘어, 송 종호, 너도 염색했구나. 우리 나이에 다들 하는 건데 뭐.’

언젠가 한 번 토요 살롱에서 밝혔지만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한 지 5년 차가 되던 2007년경,
막내가 여기로 치면 중학교 2학년인 8학년 여름 무렵,
아빠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녀석이,

“ 나는 까만 머리 아빠를 본 적이 없어.”

그 말에 흠칫 당황하기도 하고 막내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어,

“ 그럼 지금이라도 아빠가 염색을 할까?” 했더니,

지 딴에는 그래도 미안한지 머리를 떨어뜨렸지만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서 돌아오자마자 미장원에 들러 염색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까만 머리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으나 환호하는 주변의 반응도 있고 해서
여간 귀찮지 않았지만 보기 싫지 않게끔 주기적으로 계속하다가
2016년 6월 초에 막내 대학 졸업식에 참석해서,

“ 재홍아, 이제 대학도 졸업했으니 아빠 머리가 좀 허여도 괜찮겠지?” 물었더니,
힐끗 쳐다보고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니까 막내 때문에 10여년 염색을 했었다.

이런 내막을 자세히 이야기하기가 구차해,

“ 그러게 말이야, 나 혼자 너무 빨리 늙어 미안하다. 용서해다오.”

아직 오전이라 연철이가 첫 조문객으로 접객 실이 텅 비어 맨 가운데 테이블로 안내 하였는데 미처 착석하기도 전에 자기는 다른 일정 때문에 30분밖에 시간이 없어
뭐 먹고 어쩌고 할 수 없으니 번거롭게 상 차리지 말라며
대신 소주나 한잔하겠다고 하여 종이컵 소주잔을 챙겼더니,
‘아니, 술을 무슨 그런 잔에다, 여기다 따라 줘’ 하고
맥주 따르는 커다란 종이컵을 한손으로 챙겨들고 내밀었다.
얼떨결에, ‘아, 그래’ 하고 넘치도록 가득 부어주고 이런 연철이의 부산한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는 주방 도우미들에게 간단히 안주상을 봐 달라고 하고
나도 큰 잔으로 바꾸어 대작했다.

“ 혜인이, 나 최 항목이가 중학교 다닐 때 키도 작고 맨 앞줄에 앉아 친했거든.
  그런데 혜인이는 공부도 잘 했지만 좀 독특한 데가 있었지.
  중학교 2학년 땐가 우리는 까불고 노느라 뭐가 뭔지도 모를 땐데
  자기 호를 '黑 蛇‘ 라고 짓고는 그렇게 불러달라는 거야. “

혜인이에 관해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고 3때 무슨 일이 시발점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우리 가까운 친구들 사이에
자기 호를 자기가 짓는 유행이 한 때 일었었다.
시작은 세민이가 했다.
세민이는 키도 크고 깨끗한 피부에 워낙 수려한 미남이다.
우리는 한참 여드름투성이로 이만저만 고민이 아니었었는데
어떻게 된 게 세민이는 여드름도 나지 않았다.
그런 세민이가 풍자적으로 자기 호를 秋男 이라고 지었다.
세민이의 넘치는 재기가 잘 들어나는 일면이다.
이어 당대의 세기적 미남 배우인 알란 들롱을 빼닮은 재효는 恐子 라고 지어
‘역시 천재는 다르네!’ 라는  탄사를 자아내게 함과 동시에
겁이 엄청 많은 자신을 스스로 풍자해 재효를 잘 아는 친구들에게는 즐거운 웃음을 선사했다.
고2때 대학 진학 시 선택할 전공에 대한 상담용으로 학교에서
I Q테스트와 인성테스트를 했는데 개별적으로는 점수를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I Q 150이 넘는 최 상위 3명은 공개했었다.
그 중 한 명이 재효였다.
재효는 당시 모 주간지 한 면을 꽉 채운 인물 동정 난을 쓱 일견하고는
처음부터 한자도 빠뜨리지 않고 줄줄 되새길 정도로 특히 암기력이 탁월했고
과목 중에서 한시와 고문은 한성이와 쌍벽을 이루었었다.

평소 말 한마디 한마디가 해학과 농담으로 친구들을 웃겨 인기가 많았던 한성이는
尋逅 라는 다소 심각한 호를 지어 모두들 어리둥절하게 해 무슨 뜻이냐니까
‘찾아서 만난다.’ 라는 뜻으로 ‘나는 언젠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꼭 찾아서 만날 거야.”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깔깔거리며 대소했는데 그렇게 호를 지은 업보인지
아니면 자신의 앞으로 다가올 운명을 무의식중에 본능적으로 직감했는지
한성이는 칠십이 넘은 지금도 결혼 한 번 하지 못하고 그 대상을 찾아다니고 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혜인이는 씩 웃기만 하고 일체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친구들이 ‘혜인아, 너야말로 호 한 멋있게 지어야 되는 거 아니야?’ 성화를 해도
‘철 덜 떨어진 어린 녀석들 노는 게 귀엽구나. 너희들끼리 그러고 놀아.’
어른이 애들 하는 거 보고 대견해 하듯이 누구누구 호를 일일이 거론하며
‘너는 어떻게 그런 발상을 했냐. 천재다! 하고
입에 발린 칭찬도 해 주며 ‘흐흐’ 하고 입 꼬리를 올리며 웃기만 하고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중 2때 이미 호를 지었고 그걸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니
정말 음흉한 친구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기는 이미 중2때 스치고 지나간 일을 고3이 되어 뒤늦게 까불어들 대고 있으니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혜인이는 학창시절에 호를 만들고 어쩌고 하는 걸 나팔바지 유행하듯이
어린 시절 한 때 스치고 지나가는 치기 정도로 본 거 같다.
자기는 중2 사춘기에 접어들며 이미 지나간 일을 한참 뒤 늦은 고3 청년기에 접어들어
무슨 대수라도 되듯이 법석을 떠는 꼴을 보며 속으로 아마,
‘아이고 이 어린 녀석들아. 그거 아무 것도 아니야. 지나가면 그만이야,’
쯧쯧 혀를 차며 ‘꼴값들 그만 떨어라.’ 라고 하지는 않았을까 뒤늦게 부끄러운 생각도 든다.

연철이에게서 혜인이가 중2때 벌써 자기 호를 黑蛇 라고 짓고 그렇게 불러달라고 했다기에
좀 알아보니까 혜인이가 태어난 1953년이 뱀띠 해이고
그 해를 뱀 중에 유독 검은 뱀띠 해라고 했다고 한다.
좀 더 연관을 짓자면 혜인이는 피부가 여드름 하나 나지 않고 깨끗했지만 좀 검은 편이고
반드시 앞만 바라보는 눈동자가 유난히 밝고 투명했다.
‘니가 무슨 의미로 그러는지 나는 다 알고 있다.’ 는 식의 눈빛이었다.

어쨌든 그 연유를 물어 볼 당사자가 없으니 이런저런 추측만 할 뿐이다.
설마 물어본다한들,
‘흐흐, 뭐, 별 다른 뜻이 있간디? 그냥 그렇게 한 번 해 본 거지 뭐, 흐흐.’
겸연쩍은지 주위를 한 번 돌아보고는 트레이드마크인 씩 한 번 웃는 걸로 마무리해 버리지
절대 명쾌한 답변을 들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혜인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혜인이가 조용히 이야기를 듣기만 해 혜인이가 자기 이야기를
다 수긍하는 줄 착각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혜인이는 들으면서 ‘이런 놈이구나, 저런 놈이구나.’ 상대방을 판단한다.
자기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판단한다.
그 판단내용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어떤 경우에도 이야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혜인이는 누구를 좀체 칭찬도 하지 않지만 누구 비난이나 험담은 절대 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이렇고 저렇고 에 대한 판단이기 때문이다.

좀체 자기주장을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자기주장이 굉장히 강했다.
자기주장을 표현하지 않는 대신 행동으로 나타냈다.
단체 모임에서 독특한 행동을 해 설명을 해 주지 않으니 당시에는 왜 그러는지
이해를 할 수 없지만 나중에 곰곰이 되씹어 보면 그 때의 어떤 상황이
혜인이의 일관된 관념이나 가치관, 삶의 방식에 어긋나 있었음을 알게 되어
뒤늦게 아차하게 된다.

특히 자기 학문에 대한 주장은 절대 양보하지도 타협하지도 않았다.
방대하게 축적한 지식과 그에 기반을 둔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혜인이와 대화할 때는 대단히 조심해야 한다.
머리가 비상해 과거의 어떤 일도 기억하고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쭙잖게 말을 돌리거나 만들어 내거나 과거에 했던 말과 다른 말을 해서
현재의 상황에 대한 변명거리로 삼을 수가 없다.
내가 무슨 주장을 하게 되면 말없이 듣고만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가 없어
될 수 있는 한 근거가 확보되지 않는 이야기는 피하고 서로 인정하는 사실을 이야기 하거나
친구들, 학창시절 이야기 등 가벼운 이야기가 위주가 되고
지식을 요하는 이야기는 주로 질문을 하고 혜인이가 답변을 하게 한다.

혜인이는 사람이던 사물이던 사상이던 어디 한곳에 편견을 가지거나 집착하지 않았다.
어떤 종교든 종교적 편견은 없었다. 각자 추구하는 바를 다 이해하고 인정하려고 했다.
혜인이의 박사학위 논문이 종교와 사회학의 연관성에 관한 거로 기억된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 라는 걸 철저하게 인정하면서도
남녀에 관해서는 남자 할 일과 여자 할 일을 엄격하게 구분했다.
귀한 일과 천한 일, 귀한 인간과 천박한 인간으로 구분하려고 하고
신에게 의존하기 보다는 인간의 이성을 중시했기 때문에
사상적으로는 ‘조선 성리학에 바탕을 두었던 거 같다.

돈과 권력을 추구하고 물질에 집착하고 유행에 민감한 인간을 속물이라고 경멸했다.

그렇게 편견에 초연하려고 했지만 호불호는 분명했다.
음식은 가리지 않았고 특히 맛있다고 찾는 음식도 없어 여럿이 음식점에 가더라도
스스로 주문하는 경우가 없었다.
그저 대세를 따랐고 뭐가 주어지든 반찬이나 안주에는 거의 손이 가지 않았지만
싫은 기색 없이 밥 한 그릇은 비웠다.
그러나 음식 솜씨가 좋았던 혜인이 모친 이야기를 하면 동의하는 대신 씩 웃기만 했다.
아마 어머니 음식 이외에 어떤 음식도 입에 맞지 않았을 거다.

그런 호불호의 가름은 나이가 들면서 더욱 선명해진 거 같았다.
대체로 본다면 약자의 편을 더 이해하려고 했고 속물근성의 인간들을 혐오했다.
자기 자랑을 쉴 새 없이 떠버리는 인간도 아무 말 없이 듣고는 있지만 경멸했다.
학문적으로는 서양학에도 정통했지만 동양학에 더 심취했고
말년에는 결국 빛을 보지는 못 했지만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그 기원부터 추적하여
역사적으로 입증하려고 했다.

친한 친구가 몇 명 되지 않았지만 교우관계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절대 먼저 전화하거나 연락하는 법이 없었다.
비교적 자주 전화를 했던 승헌이에 의하면 가깜게 지내던 동기들 소식을 궁금해 하며
일일이 물어보곤 했다고 하는데 그래도 먼저 연락해 안부를 확인하는 수고는 하지 않았다.
궁금해 했을지는 모르지만 전화하고 안부를 묻고 하는 걸 귀찮아했고
만나는 건 더욱 더 번거롭게 생각했던 거 같다.
그런 거 자체를 무의미하고 시간낭비라고 여겼지 않나 싶다.

서울 의대를 졸업하고 안과 전문의로 울산의대 교수와 아산 병원 안과 과장을 역임한 봉재는
고1때 혜인이를 만나 대학 다닐 때까지 아주 친했다고 한다.
의예과가 문리대와 같은 캠퍼스라 자주 만나 둘이서 영화도 보러 다니고 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전혀 다를 거 같은데 둘의 분위기가 비슷한 면도 많은 거 같다.
봉재가 동교 진학을 한 혜인이와 달리 나와 마찬가지로 고교 입학시험을 치르고 들어왔지만
봉재도 평택에서 중학교를 졸업하여 시골 출신이고 둘 다 공부를 잘 한 수재였다.

고 1때 공부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천욱이, 흥면이, 승종이, 혜인이, 봉재가
같은 반이었는데 천욱이가 일등하고 봉재가 이등을 하였다고 한다.
봉재는 서울의대 생으로는 특이하게 재학 시 유신 반대 데모하다 철창신세도 지고하여
그 기록 때문에 졸업 후 군에도 장교로 못 가고 일반 사병으로 입대하여
최전방 근무를 하는 고초를 겪었다고 하니
이런 반항적이고 정의를 추구하고 행동하는 면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거 같다.

그런데 어느 날 혜인이가 전후 사정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 야, 봉재, 너 같이 속속들이 자본주의로 물든 속물을 더 이상 만나기 싫다.”

하며 일방적으로 절교를 선언한 후 서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봉재는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며 그 때의 서운한 감정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봉재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듣고 일 년쯤 지난 혜인이의 발병 초기,
가급적 주말에는 혜인이네 들러 같이 놀아주곤 할 때였는데
이런저런 동기들 근황을 이야기 해 주던 중 봉재 이야기가 나와
봉재 이야기를 전해 주었더니 옆에서 듣고 있던 부인은,

“ 아니, 우리 조 박사님이 그럴 분이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재미있으라고 과장하셨거나 잘 못 기억하고 계신 거겠지요.“

하고 펄쩍 뛰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멋쩍은 표정으로 한번 슬쩍 쳐다보고는
“흐흐, 봉재가 그래?”
입 꼬리를 올리며 씩 한 번 웃을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친구들과의 관계뿐 아니라 가족들과도 소원하게 지냈고
학교에서도 일체 보직을 맡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학문적 연구, 강의 이외
동료 교수들과의 교제나 학교 행정과는 거리를 두었다.
서울 대 사회학과 동기 모임, 서울 고 출신 서강 대 교수 모임에만 그래도 가끔이나마
그것도 거의 떠밀리다시피 해서 겨우 얼굴이라도 내밀었다고 한다.

빈소를 차린 두 번째 날 오후 느지막이 저녁 무렵까지는 아직 시간이 한참 남은
어지 중간 한 시간에 중절모를 쓰고 목도리를 칭칭 두르고 두꺼운 외투로 중무장을 한
노신사 한 분이 조문을 왔다.
조문을 마치고 이내 돌아서려는 분을 잠시라도 앉았다 가시라고 자리로 안내하고
음식상을 준비시키자 손사래를 치시면 음식보다는 소주 한 잔 하시겠다고 하여
간단히 안주를 준비하고 소주 대작을 하게 되었는데 소주잔을 받아 드시더니,

“ 나는 조교수보다 12년 서울 대 사회학과 선배이고 서강 대 사회학과 교수로도 선배인데
  조교수를 내가 서강 대로 데려오다시피 했어요.
  그러다보니까 내가 개인적으로 조교수를 무척 아껴 이런 저런 일을 가이드도 하고
  학회에 참여도 하게하고 했는데 그런 일에 너무 관심이 없는 거야.
  누구와 사귀려고도 하지 않고. 혼자서 독야청정이야.
  그래서 오늘 빈소에 오며 ‘이 친구 가족도 없고 빈소가 참 쓸쓸하겠구나.’ 했는데
  이렇게 손님을 맞아주고 상주 노릇을 하는 친구가 있다니 천만 뜻밖이네.
  평생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세상 헛살지 않았다고 하는데
  조 교수를 달리 보게 되는구만.“  

휴대폰이 없어 연락을 하려면 저녁에 하숙집 집 전화로 해야 했다고 한다.
자기가 연락할 일이 없고 시급을 요하는 일도 없으니 휴대폰이 필요하지 않았던 거 같다.
그러다 지금 부인을 만나 데이트를 시작하면서 부인과 약속 시간, 약속 장소도 정하고
그런 게 아니더라도 만나다보니까 이런저런 같이 상의할 일도 생기고
급히 연락할 상황도 발생하니까 부인 성화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휴대폰을 장만했다고 한다.

혜인이가 평생 애착을 가지고 사랑한 사람은 어머니와 부인, 두 여인이었다.
그 외 누구에게도 진정한 정을 주지 못했었다.
철저히 이성에 의존했지 ‘정’ 자체를 아예 부정했다.
정에 얽힌 어떤 일도 귀찮아하고 번거로워했다.
결혼하고 처가에 한 번도 가지 않았고 어쩌다 한 번씩 찾아오는 손아래 처남과는
그런대로 반갑게 맞아주며 지냈지만 손위 네 명의 처형과는 식사 한 번도 같이 하지 않았다.
돌아가신 큰 형과 캐나다로 이민 간 둘째형네와도 왕래가 없었고
아래 동생네와도 절연하고 지냈다,
가까이 지내는 친구도 없었고 보고 싶은 사람도 그리운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부인에게만은 예외였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생전에 못해드린 걸 후회하고 아쉬워했다.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면 눈가가 이내 붉어지고 촉촉해졌다.
명절마다, 기일마다 반드시 춘천 납골 묘에 다녀왔다.
어머니께서는 아들 사형제 중 가장 온순하고 공부 잘하고 조용하고 불평을 할 줄 모르는
셋째인 혜인이를 가장 사랑하셨던 같다.
말년에는 당신을 돌봤기 때문에 모자간의 관계가 더더욱 깊어지지 않았나 싶다.

발병 초기인 2017년 봄, 혜인이 부부와 셋이서 KTX로 여수에 갔을 때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부인이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다.
그날따라 혜인이 상태는 멀쩡했다.

“종호, 너한테 비로소 고백하는데 나는 마누라 만나기 전에 여자를 몰랐어.
지금 마누라가 첫 여자야. “

느닷없는 이야기인데다 내용에 놀라서,

“아니 그럼, 니 마누라가 첫 사랑인 동시에 첫 순정과 총각을 바친 여자라는 거야?”

‘그럼 내가 거짓말 하는 거로 보여?’ 핏대를 세우듯이
눈을 크게 뜨고 똑바로 쳐다보며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크게 끄떡였다.

“세상에! 기네스북 감이다.”

결혼하고 학교를 다녀오는 외에 혜인이는 반드시 부인과 함께 있었다.
외출도 같이 하고 모임에 참석도 동반하여 다녔다.
퇴직 후에는 거의 24시간 함께였다. 부인이 자리를 비우면 불안해했다.
부인이 운전면허 학원을 다니는 동안 매 시간 전화를 해야 했다고 했다.
나하고 셋이서 같이 여행을 가거나 교외 근방에 산책 겸 바람 쏘이러 가서도
부인이 잠시라고 안 보이면, “예, 어디 간 거야? 왜 안 보여?”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휘둥 거리며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부인은 대소변을 받아내면서도 조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씹지도 못하고 삼키지도 잘 못 해 유동식 식사 한 번 시키는데 2시간이나 걸리며
갖은 애를 다 써야 하는데도 요양병원에 입원시킨 걸 두고두고 자책했다.
혜인이는 자기가 유일하게 사랑한 사람으로부터 지극한 정성과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다.

사랑하는 친구, 혜인이의 영면을 빌며,

2022.02.13. 송 종 호.




토요 살롱 345회 " 四 人 體 制 "
토요 살롱 343회 " 동에서 서로 퍼진 근대 공민사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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