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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호(2022-02-20 18:48:36, Hit : 207, Vote : 56
  토요 살롱 345회 " 四 人 體 制 "

입춘이 지난 지 보름도 넘었고 눈이 녹아 비가 된다는 우수가 어제였는데도
새벽에는 영하 10도에 근접하고 낮에도 영하의 매서운 추위가 연일 계속되고 있다.
우수 경칩에 대동강 풀린다는 속담이 무색한 날씨다.  
주중 며칠간은 최저기온이 영하10도 이하로 떨어지고 낮에도 영하에 머무는 등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로 기록되기도 했었다.
2월이 다 가도록 엄동설한이 계속되자 해가 바뀐 게 언젠데
새해가 시작된 지 한참 지났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 추위가 다음 주까지 이어진다니까 3월은 되어야 온기도 돌고 해동도 되고
뭔가 변화를 느낄 수 있게 되려나 보다.
유례없이 길고 긴 겨울이다.

나는 혜인이를 고2때 같은 반이 되면서 처음 알게 되었지만
학년 초에는 서로 별로 아는 체를 않고 지냈다. 아니 그럴 기회가 없었다.
키가 차이가 나, 나는 맨 뒷줄이었고 혜인이는 맨 앞줄이라
우선 서로 마주칠 일이 없었다. 앞줄과 뒷줄은 출입문도 달랐다.
그리고 앞줄은 비교적 모범생들이었고 뒷줄은 비교적 싱거운 문제아들이었다.
그런 저런 연유로 앞줄과 뒷줄은 같은 반이라도 별로 친 할 기회가 없어
서로 이름만 알고 지낼 정도로 소원한 관계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다보니까 졸업 후 서로 안면은 있지만 같은 반원이었는지 잘 기억 못하는 경우도 많다.

내가 처음 샌프란시스코에 들렀을 때 재효가 하루는 나한테 접대한답시고 골프장을 예약했다.
종하 외 다른 한 명은 이름을 들어도 전혀 생소했다.
내가 안면은커녕 이름조차 모르는 동기들이 부지기수라 더 이상 물어보지도 않았다.
골프장에서 만나 인사를 나눌 때도 작지 않은 키에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반바지 차림에
캘리포니아 햇볕에 그은 검붉은 피부에  만면에 싱글싱글 웃음을 지으며,
‘종호, 오랜만이다. 나, 정필이야, 권 정필.’ 하는데 전혀 알아 볼 수도 없었고
권 정필이라는 이름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리둥절해 하며 어색해 하는 나를 보다 못해 옆에 있던 재효가,

“얘가 권 정필이야. 일학년 때 우리 다 같은 반이었잖아. 4번 권 정필.
학교 다닐 때는 맨 앞줄에 쪼끄마했었는데 졸업하고 미국 와서 이렇게 컸대.“

그런 부연 설명에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덕성 재단 이사장을 역임하고
현재 장관급인 한국학 중앙연구원(전 한국 정신문제 연구소) 원장으로 재직 중인 안 병우가
10여 년 전 한신 대 역사학과 교수로 재임하던 시절 일 년 간 안식년을
미국에서 보낸 적이 있었다.
같은 용자 멤버들로부터 병우가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곳에 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미국 간 김에 병우에게 연락해 반갑게 인사를 나누다 주소를 물었더니
병우가 자리 잡은 동네가 우리 집에서 차로 불과 5분 거리였다.
당시 서울 대를 다니던 차녀는 해외 생활을 거부해 한국에 두고
부인과 이대 재학 중이던 장녀와 함께 와 있었다.

병우가 미국에 와서 동기들과 일체 연락을 않고 지내다 나하고 연락이 되는 바람에
워싱턴 지역 동기들과도 만나게 되었는데
우선 스타트로 그곳 터줏대감인 희경이와 식사 약속을 하였다.
나는 병우와 희경이가 3학년 때 같은 반이었기에 별도 설명을 않고 셋이서 만났지만
놀랍게도 둘은 서로 기억을 전혀 못 하고 있었다.
서로 통성명을 하며 족보를 따지기에,

“ 야, 너그들, 우리 모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어. 3반.”

그 제서야 둘 다 머쓱해했지만 그래도 기억이 아물아물한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혜인이와는 둘 사이에 그런 결정적인 이질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흐르며
평생 잊을 수 없는 깊은 사연들이 쌓이게 되었다.

혜인이와 나는 그런 외모적인 차이 이외에도 성격도 판이했다.
나는 매사 먼저 나서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어떤 만남에서나 모임에서건
내가 제안하거나 모임을 발기하지 않았을지라도 그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사 표현을 하여
어떤 식으로라도 결정이 도출되면 군말 없이 그에 따라 결정 사항 중 나와 관련된 부분은
바로 행동에 옮기며 단체와 함께하는 스타일인 반면에
헤인이는 매사 자기의사 표현을 유보하며 느긋하게 관조만 하지
움직이고 행동하는 걸 극도로 꺼려했다. 무슨 일이든 절대 먼저 나서지 않았다.

나는 친구를 사귀고 만나고 모임을 갖고 떠들썩한 분위기를 즐기지만
혜인이는 여럿이서 만나는 걸 싫어했고 불가피하지 않는 한 그런 모임은
될 수 있는 한 피하려고 했다.  
그래서 둘 다 잘 아는 친구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외형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극과 극인 나하고 혜인이가 친구가 될 수 있었다는 걸 신기해했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었다.
책을 좋아했고 상대방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편이고 토론을 즐겼다.
둘 다 강자의 입장에서의 강압이나 강요에는 본능적으로 저항하는 반항아적인 기질이 있었다.
권위주의와 차별의식을 알레르기를 일으킬 정도로 싫어했다.
영화 보기를 즐겨한다는 취미도 공유했다.
고교를 졸업하고 한 때는 만나면 아침이든 점심이든 저녁이든 시도 때도 없이
무조건 술로 시작하여 술 마시기가 공통된 취미일 정도로 술도 엄청 마시고 다녔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술을 마시기 시작하여 고교 때도 가끔씩 술자리를 하여 술 맛을
비교적 소시 적부터 알게 되었지만 혜인이는 대학 입학 하면서 술을 배웠다.
그러나 대학교 졸업반이 되면서 그 동안 깡 술만 들이키던 혜인이가
위장약을 들고 다니면서 술을 절제하게 돼 그나마 찔끔 나타나던 모임도 자제하는 바람에  
우리 만남의 내용도 달라지게되었다.
그렇게 된 데는 다른 큰 이유도 있었지만 우선 다 같이 만나는 횟수가 줄게 되었다.

고 2때 나하고 안면을 트기 전에 혜인이는 세민이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고2때 세민이의 장래 희망은 영화감독이었다.
당대 최고 미인이었던 대만 출신 여배우 리칭에 반하여 리칭이 주연한 영화 ‘수잔나’를
수 십 번도 더 보고 다녔고 수업 시간 중에도 같이 땡땡이 치고 ‘수잔나’ 보러 갈 동지를
모집하곤 했었다.
‘예쁜 여배우를 마음대로 사귈 수 있어서’라는 세민이의 영화감독이 되려는 이유가
혜인이의 귀를 솔깃하게 했다.

“ 키 크고 미남인 세민이도 영화감독이 되어 예쁜 여배우들과 사귀려는데
  하물며 나야말로 영화감독이 되지 않는 한 어떻게 예쁜 여자를 취 할 수 있겠는가.“

혜인이가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의사를 공개적으로 표현한 게.
‘나도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 였다.

게다가 세민이가 조숙한데다 삐딱한 데도 있어 멸공, 반공이 국가적 이념이었던 당시에
‘애들이 뭘 알아.’ 식으로 모 택동 어록이라며 단편적으로 흘리고 다녀서,
들어서는 안 되는 금기사항을 무심결에 듣고 놀란 가슴 쓸어내리느라 애써 못들은 것처럼
외면하고 시침을 떼려고 했지만 그러나 순진했던 우리들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반면에
뭔가 경외감과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었다.
이런 세민이에게 아직 미숙하고 순진했던 혜인이가 속 된 말로 뿅 가고 말았다.

자연히 쉬는 시간마다 뒷자리로 와 세민이 옆에 붙어 있다시피 하였고
친구라기보다 세민이를 경외하고 세민이 말이라면 무조건 경청하는 등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사제지간 같은 사이가 되었다.
이렇게 혜인이가 맨 뒷자리로 들락거리면서 키 크고 교칙 같은 걸 개떡으로 여기는
싱거운 불량아들과도 소통하게 되었는데
혜인이로서는 아마 처음 접해보는 세계였는지 실지로는 어디 얽매이기 싫어하고
누구한테 간섭 받기를 더더욱 싫어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자기가 지배하려는
자유를 갈망하는 자신의 성향과 잘 맞는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는지
뒷자리에 앉아 싱겁을 떨던 자유로운 영혼의 그런 친구들,
겉보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거 같은 김 한성, 박 재효, 유 갑호, 김 승헌 등과
이후 50여년을 함께 하게 되는 우정을 맺게 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중 미국에 거주하는 재효를 제외하고 김 한성, 유 갑호, 김 승헌은
김 일과 더불어 딱 4명이 혜인이 결혼식에 초대 받았고 승헌이가 결혼식 사회를 봤다고 한다.
  

이렇게 처음에는 세민이 따라 영화감독이 되려고 영화에 입문하게 된 외에
세민이를 통해 혜인이는 비록 설명도 없고 내용도 없는 몇 마디 구호 정도에 불과했지만
혜인이 일생과 학문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 우리가 배운 사상과 이념과 너무나 배치되는
공산주의와 모 택동에 대한 이야기도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세민이와 혜인이의 관계는 혜인이가 고교를 졸업하며 영화감독에의 꿈을 접고
대학에서 정통 학문을 공부하며 소원하게 되었다.
그 이후 둘이 서로 개별적으로 연락하거나 만나는 경우는 없었던 거 같다.

세민이는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영화감독이 되었고 꿈이었던 예쁜 영화배우와 결혼 후
집들이에 가까운 동기 친구 몇몇이 초대받았을 때 혜인이도 같이 갔었는데
그게 세민이와 혜인이의 마지막 만남이 아니었을까 싶다.

고3 때 담임선생님은 충남의 명문 대전 고 출신으로 서울 대 사대 사회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무학여고 등 주로 여학교에서 근무하다 처음으로 남자 고교에 전근 온 아직 30대의
젊고 패기와 열정이 넘치는 분이셨다.
부임하자마자 고3 담임을 맡으셨는데 하필이면 12반 중에서도 가장 개성이 넘치고
말도 제일 안 듣고 문제아들이 제일 많았던 우리 3학년 3반을 맡게 되셨다.
아직 젊은 나이에 앞머리가 벗겨져 이마가 다 들어 난 대머리에 불그레한 혈색으로
키가 땅딸막하고 똥똥했지만 목소리는 우렁찼고 실력이 있어
매시간 한 결 같이 열정을 쏟아 붇는 강의는 줄줄 막힘없는 명 강의였다.

당시 3학년 담임은 30,40대 젊은 서울 대 출신이 주를 이루어서인지 학교의 명예도 있었지만
‘어느 반이 서울 대 진학을 많이 했냐.’를 두고 반간의 경쟁이 엄청 났었다.
우리 반 담임은 부임 첫해에 바로 처음 맡는 고3 담임이라
그런 면에서 경쟁의식과 의욕이 넘쳤다.

그래서 우리 반 담임이 반원을 장악하여 자기가 의도한 대로 반을 끌고 가
서울 대에 가장 많이 진학시키기 위해 택한 정책이 기합과 매질이었다.
앞줄은 주로 모범생들이라 담임의 정책이 별 필요가 없었지만
문제아들이 무더기로 차지하기 있는 뒷줄은 키가 담임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덩치도 비교가 안 돼 뺨을 때리려면 위로 보고 쳐야 돼 치려는 순간 고개를 쳐들면
헛손질을 하게 되어 오히려 망신만 사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자기는 교단 위에 서서 발 받는 학생을 교단 밑에 두고 때렸다.

담임의 과욕이 부른 첫 불상사는 학년이 시작한지 몇 달지나 초여름에 접어든 6월 경,
방과 후 반원들이 모두 제3운동장으로 끌려가 ‘엎드려뻗쳐’ 단체기합을 받는 도중에
발생했다,
화를 못 참아 씩씩거리느라 얼굴이 시뻘게진 담임이 매를 들고 다니며
엉덩이를 들거나 팔을 굽히면 사정없이 매질을 해 댔다.

방과 후라 지친데다 팔이고 다리고 버티는 힘이 한계점에 도달해 통증이 가증되는데
그날따라 바람 한 점 없이 초여름치고 유난히 더운 날에 오후 5시가 넘었지만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어 맑고 쨍쨍한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볕에
진땀이 삐질삐질 삐져나와 짜증이 폭발직전까지 닿았을 때쯤,
옆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던 세민이가 갑자기 입에 거품을 물고 옆으로 쓰러졌다.

세민이 땜에 단체기합이 중단되었지만 이 사건으로 반원들이 담임에 오히려 더 항거하게 되고
심정적으로 똘똘 뭉친 동지의식 같은 거가 형성되게 되었다.
이렇게 조성된 1971년 서울 고 3학년 3반의 결속력은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다수 반원들의 공토의 추억이 되었을 뿐 아니라 마음에도 여전히 남아있어
반원 간에 회자되고 있고 끈끈한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  

또 이 사건으로 인해 한성이가 주도한 지하신문 ‘한성순보’가 부산물로 탄생하게 되었다.

당시 김 근태, 이 철, 유 인태 등 체제에 저항하던 서울 대 재학생들이 제작해 등사본으로
암암리에 유통되던 대표적인 지하신문 ‘자유의 종’을 흉내 냈지만
아직 고교생인 우리들의 격에 맞지도 않았고 뭔가 심정적으로는 동조를 하였지만
이유를 설명할 만큼 뭘 알고 있지도 않은데다 왠간만 하면 무조건 빨갱이로 낙인찍히던 때라
솔직히 겁도 나 체제에 항거하는 내용은 쓰지 못하고 담임 욕하고 비난하는 내용이나
우리들의 일반적인 관심사 위주로 몇몇이 돌아가며 썼는데
주요 필진이 한성이, 재효, 혜인이, 그리고 나였다.

전혀 엉뚱하게도 갑호가 가끔 자작시를 올리곤 했는데
문학적 감각과 시를 구성하는 적절한 단어의 선택, 예민한 감성과 감정이
권투를 하고 우락부락한 커다란 체격에 커다란 쌍꺼풀눈이 부리부리한 겉보기와는 전혀 달라
처음에는 어리둥절해 혹시 어디 시집에서 도용 했나 라는 의심도 하곤 했었다.
갑호는 자신의 시적 재능을 칭찬할수록 자신을 쪼그라뜨리고 부끄러워하며
바깥으로 들어내는 걸 창피하게 여겨 좀체 글을 잘 쓰지 않지만
동옥이를 기리며 쓴 추모 시에 갑호의 재능과 진정성이 너무나 잘 나타나 있어
나는 가끔 갑호가 생각나면 40주년 기념 문집에 실린 갑호의 시를 들쳐보곤 한다.

이렇게 조잡하게 발간된 한성순보가 운명적으로 김 한성, 조 혜인, 박 재효, 나, 네 명을
평생을 두고 동지이자 친구인 특별한 동지적 우정 관계를 맺게 해 준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당시 대통령이던 박 정희의 핵심 꼬봉으로 집권 여당이었던 공화당 내에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여 박 정희의 명을 받들어
국회를 좌지우지하며 3선 개헌을 추진하던 소위 4인방이
(김 성곤, 백 남억, 김 진만, 길 재호) 세간에서 ‘이 네 명이 다 해쳐먹는다.’를 빗대어
언론에서 ‘四人体制’ 로 칭한 걸 모방해 우리 네 명의 모임을 사인체제로 이름 지었다.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여러 정황 상 재치가 승한
재효의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이로 인해 다른 친구들의 시샘도 받았지만 ‘ 꼴값 떠네, 놀고 있네.’ 등
야유와 조롱, 빈축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그 명칭에 흡족해하며 한편으로는 자부심도 가졌던 거 같다.
한참 하늘이 높은 줄 모를 때였으니까.
우리가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고 다니지도 않았고
누구에게 그런 명칭을 일부러 알리지도 않았지만
은연중에 우리는 ‘四人体制의 일원’ 으로 숙명적으로 만나 절대 변치 않을 인연임을
마음 한 구석에 새기고 살아왔었던 거 같다.

이러는 와중에 한성순보가 몇 번 발행되며 인기를 끌어 반원의 거의 전부가 돌려 보고
다른 반으로까지 유출되자 누군가가 이걸 복사해 담임에게 전후좌우를 몽땅 일러바쳤다.
물론 비밀이 될 수도 없고 언젠가는 알려지겠지만 반원 중에 프락치가 있었던 거다.

결과로 게재된 내용에 불같이 화를 낸 담임이 나와 혜인이의 대학입학 원서 지원서에
학교장 직인 날인을 거부했다.
한성이는 이름만 발행인이지 실제로 글을 쓰지 않았고 재효는 전혀 무해한 글을 올려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사면 받았다.

“ 너희 같은 문제아들은 대학을 가면 안 돼.
  가서 문제 밖에 일으키지 않을 거고 결국은 사회악이 될 거니까.”

당시에는 학교에서 대학별 입학원서를 학교장이 날인해 학교에서 대신 접수했었다.
학교에서 단체 접수에서 제외시키겠다니까
혜인이와 나는 우리가 직접 쓰서 접수할 수밖에 없겠구나 하고 체념하고 있었는데
마감일이 임박해 담임이 나를 불렀다.

“ 송 종호, 너는 원서를 써 주마. 그런데 네가 지원한 정치학과는
  너 모의고사 성적이 들락날락해 안심할 수 없으니까
  안전하게 철학과나, 국문학과, 사학과 아니면 어문학과 정도로 낮춰.“

“ 혜인이는요?”

“혜인이는 절대 못 써줘.”

“그럼 저도 혜인이와 같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학교에서 우리 둘이 유일하게 원서 접수 마감 날
나는 정치학과에 혜인이는 사회학과에 지원하여 우리가 직접 원서를 써 들고
혜화 동 서울 대 문리대로 같이 가서 접수하는 바람에 수험번호가 나란히 붙어
시험도 앞뒤로 나란히 앉아서 봤다.
그래서 매 과목 시험을 마치자마자 서로 답안을 맞춰볼 수 있었다.
이틀간의 학과 시험, 3일째 면접을 마치고,

“ 혜인아, 시험 마쳤으니 후련하게 털고 시원하게 한잔하러가자.” 니까.

“ 종호야, 너는 시험을 잘 봐 합격할 거니까 술마시러가도 되지만
  나는 시험을 못 봐 떨어질 게 확실하니까 집에 가서 2차 준비해야 되겠다.“  

부러워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풀이 죽은 모습으로 돌아섰는데
결과적으로 기고만장하며 시험 마치자마자 친구들을 불러내 술판을 벌이고
흥청거리며 여유를 부리던 나는 보기 좋게 떨어지고 혜인이는 합격을 했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명륜 동의 성대와 혜화 동의 서울 대 문리대는
골목길을 질러 다니면 바로라 혜인이와는 사흘이 멀다 하고 만났다.
주로 혜인이가 같이 문리대에 다니던 국문과의 동옥이, 정치학과의 채인이,
국사학과의 종하와 함께 성대로 쳐들어 와 아침이든, 낮이든, 저녁 무렵이든
내 형편은 전혀 무시하고 나를 끌고 명륜 동 길 건너 골목에 싸구려 튀김집으로 끌고 가
카바이트로 빚은 많이 마시면 골 때리는 밀가루 막걸리를 퍼마셔댔다.

나는 대학생활 내내 학교 근방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때로는 하숙도 하고
때로는 여럿이서 방 하나 얻어 자취도 하곤 했는데
이 친구들은 내 거처 지를 아예 “ 종 다방” 이라 명명하고 무시로 들락거렸다.

우리 사인체제는 학교를 졸업한 1972년 봄에 혜화 동 로터리 상업은행 지하에 있던
복지다방에서 한성이의 주선으로 정신여고를 졸업하고 숙대에 갓 입학한 네 명의 여학생과
처음 미팅이란 걸 한 후 이들과 대학 졸업할 때까지 많은 추억을 쌓았다.
이들과의 이야기는 토요살롱 90회 ‘1972년 북평 해수욕장’,
91회 ‘1972년 속초 대포 항, 그리고 그 이후’ , 토요 살롱 113회 ‘복지다방 복자’ 편에
비교적 상술하였으니 여기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1974년 진명 여고를 졸업하고 성심여대에 다니던 내 사촌 여동생 주선으로
이화여고, 경기여고 출신들로 성심여대, 이대, 고대를 다니고 있던
여학생 다섯 명을 소개 받아 내 여동생 포함 여학생 여섯 명과 우리 사인체제 4명에
이 채인과 이 명식이 합류하여 모두 12명의 대 인원이 13박 14일 제주 캠핑을 다녀왔는데
이 때 이야기도 토요 살롱 92회, ‘1974년 제주.’ 편에 상술하였다.

관심 있는 분들은 우리 동기 두 번째 홈피 24.old.seoulgo.net의 토요살롱 난에
토요살롱 1회부터 최근까지 게재되어 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1974년 제주 원정 시 한 가지 이야기를 더하자면
우여곡절 끝에 제주에 도착하여 제주에서 쏟아지는 빗속에 우왕좌왕하다
우연히 만난 나의 제주출신 같은 과 친구의 도움으로 그 집에 하루 묵으며 비를 피한 후
다음 날 한라산으로 출발하려고 부산하게 여장을 꾸미는데
혜인이가 느닷없이,
‘나는 그만 서울로 돌아갈란다.’
우리가 모두 나서 만류해도 입을 꾹 다물고 자기 짐을 챙기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갑작스런 일이라 망연자실하여 어쩌지 못 하고 있는데 옆에서 관망만 하고 있던 한성이가,
‘나도 혜인이하고 같이 가야겠다.’

이렇게 황당하게 둘이 떠나자 어색해진 분위기는 금방 회복할 수 있었지만
남은 우리 남자 넷은 오락가락 비속에 여학생 여섯 명의 짐을 나누어지고 다니느라
있는 고생, 없는 고생 다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우리 사인체제도 관계가 서먹하게 되었고 그렇게 단짝이었던
혜인이와 채인이의 우정도 소원하게 되었다.
자연히 다 같이 만나지지가 않았다.
물론 졸업학년이 되어 다들 자기 일이 바빴고 혜인이는 이때쯤 위장을 헤쳐
금주를 하고 있는 등 기타 여건도 한 몫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현대에 입사한 재효 하고나 가끔 만났을까 대학원에 진학한 혜인이나
고시공부에 열중하던 한성이하고는 상당히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나는 해외출장이 잦다 1982년 봄에 인도네시아로 떠나고
혜인이는 미국 유학길에 또 안부조차 주고받지 못한 채 세월을 흘려야했다.

그러고 7년이 지난 1989년 봄, 내가 해외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던 해
때 맞춰 혜인이도 미국의 아이비 명문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현대 하이닉스 해외지사에 근무하고 있던 재효를 제외하고 다시 다들 모이게 되었다.
당연히 우리 집이 아지트가 되었다.
동옥이 왈, ‘ 종 다방 재 오픈!’
혜인이는 미국에서 박사학위가 통과하자마자 귀국하는 바람에
박사학위 논문을 돌아와서 제본하게 되었는데 초판을 발행하자 바로 그 날
한부를 들고 와 큰애가 갓 난 애기였던 애들 엄마에게 증정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혜인이가 귀국하여 한 동안 자리를 못 잡아 시간 강사를 다니다
서강 대 교수로 부임하면서 또 소식이 뜸해졌다.
오로지 학교, 학문, 강의에 몰두하며 세상인연을 끊어버렸다.
쓸데없는 시간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싶다.

몇 년에 한 번씩 스치듯 만나다 혜인이가 결혼을 하고 모친상을 계기로 다시 만나게 되고
혜인이 부인이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바람에 혜인이를 다시 끌어낼 수 있었다.

발병 초기,

“ 혜인아, 나는 몸도 불편하고 생각도 오락가락하고 금방 뭐 했는지 가끔 기억도 잘 못 하고
  말도 또렷하지 못 한 지금의 네가 총명하고 총기가 넘치던 예전의 너보다 훨씬 좋다.
  왜냐하면 지금 너는 싫은 거 좋은 거 의사표시가 분명하고 솔직해서야. “

아직도 못 다한 이야기가 많은 거 같은데 기회가 다시 있을지 모르겠지만 후일로 미루고
혜인이 이야기는 여기에서 일단 마무리 하려고 한다.
50여년 세월 ‘四人体制’의 한 축이었던 혜인이는 이로서 우리들의 추억과  마음속에서만
존재하게 되었다.  

명복을 빈다.

2022년.02.20. 송 종 호.




토요 살롱 346회 " epilogue "
토요 살롱 344회 " 黑蛇, 趙 惠 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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