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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호(2022-03-06 18:12:45, Hit : 160, Vote : 43
  토요 살롱 346회 " epilogue "

지난 주말에 갑자기 일정이 생겨 토요 살롱을 올리지 못 했다.
토요 살롱을 처음 쓰기 시작한 게 2009년 6월이었으니까 금년이 만으로 13년째다.
2010년부터 2년여 공백기가 있었지만 지난 회까지 토요살롱 346회를 올렸다.
붓을 놓은 2년여를 제외한 11년 동안 년 평균 30회 정도를 써 올린 셈이다.
한 회가 A4 용지 7매 가량 되니까 전체가 A4용지로 약 2,400매 분량이다.
그러는 사이 세월이 무심히 흘러 우리 나이도 중년이라고 불릴 수 있었던 50대 말에서
60대를 거쳐 황혼의 노년기인 70대가 되었으며 그런 세월의 깊이를
가장 극명하게 입증하는 예로 그 사이 많은 동기들이 세상을 떠났다.

어느 통계에 의하면 80까지 생존할 확률은 30%, 90세는 5%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70대의 사망률은 상당하다는 걸 추론할 수 있다.
얼마 전 21회 선배와 통화하던 중,

“형님, 지난 해 제가 우리 동기들 추모사를 여섯 번이나 썼습니다.”

목소리를 쫙 깔고 자못 비감하고 서글픈 어조로 말했더니,

“ 그래? 그거밖에 안 돼? 우리는 지난 해 열 두 명 상 치렀어.
  더구나 너희들은 열 두 반이지만 우리는 여덟 반이잖아.
  비율적으로 따지면 너희들이 우리보다 50%는 더 많아야 되는데 반밖에 안 되니
  엄청 양호한 거야. “  

언제부터인가 동기들 추모사를 혼자서 도맡아 쓰고 있다.
소위 고인과 절친으로 알려진 동기들도,
‘고인과의 추억이나 에피소드는 기억나는 대로 이야기해 줄 테니까 추모사는 니가 써라.’
당연하다는 듯이 나한테 미루는 바람에 추모사 전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잘 모르는 주제에 섣불리 썼다가 오히려 고인의 명예를 손상시키거나
유가족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우려가 될망정 쓰는 거 자체를 꺼려하거나
기껍다고는 하지 못 할 지라도 마지못해 하지는 않는다.

고인의 생전의 모습을 그리는 동안 나도 추모의 마음을 함께 할 수 있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50여 년 전 고교 시절로 되돌아 가
그 시절의 잊지 못 할 추억에 흠뻑 젖을 수 있는데다
무엇보다 고인이 남긴 족적에 대해 뭔가 흔적을 남길 수 있고
유가족들에게 다소나마 위안이 될 수 있다면
나로서는 시간을 좀 할애하고 생전의 고인의 기록을 좀 수소문하는 정도의 수고와
몇 시간 자판을 두드리는 별 거 아닌 노동력만 투입하면 되니까 무슨 대단한 일도 아니고
그거 가지고 무슨 칭찬을 받을 일도 아니며 생색을 내거나 자랑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물론 나이가 나이인 만큼 자판을 오래 두드리면 눈도 피로하고 허리도 뻐근하다.
그래서 요즘은 논스톱으로 몇 시간이고 두드리던 예전과는 달리 한 두 시간 두드리고
좀 쉬었다 다시 시작하는 식으로 쉬엄쉬엄 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주 만나거나 연락은 못하지만 문맥상 꼭 등장 시켜야 하는 동기 이름이
가물가물해 동기 명부를 찾고 평소 잘 쓰지 않는 단어가 생각이 안나
국어사전이나 인터넷에 의존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16대 노 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이 명박, 박 근혜, 문 재인 대통령을 거쳐 바로 다음 주 화요일에
20대 대통령 선거를 치르게 되어 그 동안 네 번 대통령이 바뀌고
다섯 번째  대통령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직 현직인 문 재인 대통령을 제외하고 지나온 세 대통령 중
한 대통령은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탄핵 당하고 두 대통령이 감옥을 가고
한 대통령은 퇴임 후 자살하였으니까 단 한 대통령도 멀쩡하지 못했다.
그만큼 격변의 세월이었다.
그런 참담하고 비극적인 결과만을 보면 어디 아프리카나 남미의 최 후진국에서나 일어나는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싶을 정도지만
그러면서도 꾸역꾸역 세계 10대 경제대국에 진입하고 국민소득이 꾸준히 늘어
이제 일인당 소득이 3만5,000불이 넘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우리 국민 누구도 그 중 어느 누가 재임한 기간 동안 경제적으로 만족스러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속적인 불황이었다고 생각하기에
어느 대통령도 전임 대통령보다 나았다는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 번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코로나로 재임 2년 이상을 날려 보냈지만 다른 분야는 차치하고라도
경제에 관해서만은 국민들로부터 지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어느 조직에서건 리더십은 여러 원인이 있고 변명거리가 있을 수 있겠지만
결국은 결과물로 평가받게 되어 있다.
정치적 리더십은 더 하다. 오로지 결과로서 평가받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경제는 선진국에 진입하였다.
저렴하고 숙련되고 날래고 부지런한 최상급 노동력에 의존하여 급성장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기술력도 세계 최첨단으로 최고의 기술 선진국들과 경쟁하고 있다.
실제로는 아직은 아니겠지만 우리 젊은이들은 우리 세대가 절대 넘사벽으로 여겼던 일본을
더 이상 우리의 경쟁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뿐만 아니다.
전자, 반도체, 자동차등 상업 제품 외에도 우리 세대가 절대 상상도 못 했던
케이 팝이다, 한류다,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담은 콘텐츠를 앞세워
세계적 문화 콘테스트를 휩쓸며 우리나라, 우리민족의 흥과 문화가 세계로 전파되고 있다.
우리 한식도 격상된 나라의 위상과 함께 세계에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각광을 받고 있다.
대학에 한국어과가 있는 나라가 수 십 개국에 이르고 전 세계 수 십 개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우리나라에 유학을 오고 있다.

세계적으로 한류 마니아가 백 수 십국에 걸쳐 1억 5천만 명이 넘는다는 보도도 나왔다.
현재 우리나라 인구의 3배다.
아주 순식간에 이제는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괄시받거나 천대받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한국 국적의 여권을 소지하고 있는 거 자체가 너무나 떳떳하고 자랑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
불과 5,6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 청년들이 조국에서의 미래를 보지 못해
해외로 탈출함으로 돌파구를 찾고 희망을 이어가려고 했었는데
코로나를 겪으며 소위 선진국들의 대응 과정을 보면서
오히려 더 이상 선망하는 나라가 사라졌다.

단적인 예로 2019년에 주한미국 대사관에 영사 과가 폐지됐다.
물론 한 미 간 무비자에 전자비자로 대체해 비자 업무가 대폭 준 영향이 크겠지만
취업 비자, 유학 비자, 영주 권 신청 업무도 대폭 줄었다고 한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광화문 미 영사관 앞에 비자 신청하러 하루 종일 몇 백 미터
길게 줄이 늘어져 있던 때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라 하지 않을 수거 없는 거 같다.

노 무현 대통령 시절 우리 국민소득이 2만 불을 넘었다고 하여 신기해하면서도
실생활에서는 체감이 안 돼 ‘설마?’ 반신반의하며 정부에서 국민들을 호도하기 위해
후까시 넣는 줄 알고 냉소했었고
문 재인 정부 첫해인 2017년, 일인당 국민 소득이 3만 불에 도달하였다며
우리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할 때도 ‘뭐 달라진 게 없는데 웃기고 있네.’ 였었지만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지난 해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3만 5천불이 넘었다는
보도를 접하고는 코로나로 역경을 겪고 있고 집값 폭등으로 전 국민이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풋풋하고 열정적이고 지칠 줄 몰랐던 아직도 20대였던 1970년대 말부터
가난하고 지구 변방의 약소국이라 잘 알려지지도 않았던 대한민국 여권을 들고
잔뜩 주눅이 들어 세계를 여행하며 가는 곳마다 Republic of Korea가 어디쯤에 붙어 있는지
어떤 나라인지를 진땀을 흘리며 설명해야했던 나로서는
그 숫자의 의미가 새삼 다가오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일인당 소득만 가지고 선진국 운운할 수는 없겠지만 기준이 될 수 있는 교육 수준,
일반적인 국민들 의식 수준, 복지, 문화, 공무원의 청렴도, 안전 보장, 질병관리등도
우리나라의 수준이 비교해 봤을 때 어느 선진국 못 지 않게 높아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가 문제야.’ 라고들 하지만 정치가 문제면 나라가 발전할 수 없고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듯이 정치를 잘 못하면 나라가 망하기가 십상인데
우리나라는 경제뿐 아니라 다방면에서 발전을 거듭하며 수준을 높여왔으니까
구지 정치가 잘못됐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 싶다.
따라서 20대 대통령이 누가 되든 잘못될 경우 절대 용서하지 않는 국민의식이 살아 있는 한
역사를 역행하는 일은 단연코 없을 것이다.

이번 주 초 만해도 날이 차가웠는데 주말이 가까워오며 이제야 날이 좀 풀리는 거 같다.
그러나 꽁꽁 언 땅이 녹을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있고 다음 주 초까지도 영하라지만
그리고 아직도 꽃샘추위가 한 번은 더 남아 있겠지만
낮에 부는 바람의 냉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차갑다 기 보다 시원한 상쾌함이 앞선다.
아직 봄의 기운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지만
이 제서야 그토록 유례없이 길고 너무나 추웠던 겨울이 다음 주자에게
배턴 체인지를 하려고 주춤거리는 거 같다.

혜인이 추모의 글을 여섯 번에 걸쳐 나누어 실었는데도 뭐가 다 정리가 안 된 느낌이다.
그만큼 아쉬움이 커서일까.
20여 년 전인 2000년 봄에 동옥이를 보내고 추모사를 다섯 번에 걸쳐 써 올렸는데
그 때도 그런 미진함과 아쉬움이 컸었다.
그러면서 ‘못 다한 이야기는 다음에 생각날 때마다 틈 날 때마다 또 쓰면 되지 뭐.’
했었는데 결국은 20년이 넘도록 한 자도 더 쓰지 못 했다.

동옥이가 뉴 밀레니엄 해인 2,000년 3월 8일에 사고를 당했으니까
다음 주 화요일인 3월 8일이 동옥이 22주기이다.
동옥이 주기가 돌아오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친구가 갑호다.
갑호는 동옥이의 글을 흠모했고 동옥이의 인간성을 사랑했고 동옥이의 천재성을 존경해
무작정 동옥이와 행적을 함께했다. 거의 뒤 따라다니다시피 했다.
동옥이의 맹신적인 추종자였다
동옥이 빈소에서 충혈 돼 시뻘건 눈으로 닭똥같이 굵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넋을 잃고 망연자실해 있던 갑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또한 갑호 양력 생일이 동옥이 망일과 겹쳐 둘을 떼 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그 다음에 중하다. 중하는 동옥이의 막역한 술 친구였다.
동옥이는 매일 술을 마셨다. 구지 따지자면 매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나와서 돌아다니고 연락이 될 때이다.
일 년에 한 두 번은 잠적을 해 버리고 두어 달간 연락이 끊긴다.
사라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말을 안 해 처음에는 이유를 몰랐으나 나중에 알게 된 사연은
그 동안 영문 번역을 한다고 했다.
책 한 권을 완역하는 동안 일체 대인관계를 끊고 작업에 몰두했다.
동옥이는 더 이상 교정이 필요 없을 정도로 영문 번역 계에서는 대가로 인정받아
고료도 최고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탈고를 하면 줄곧 술이었다.
술 마시자고 하면 선배, 후배, 동기, 동료, 누구를 막론하였고 청탁을 가리지 않았고
실려 갈 지경이 되어도 사양을 하지 않았다.
술자리에서는 어떤 논쟁에도 끼어들지 않았고 호탕하게 껄껄 웃기만 해 인기도 최고였다.
그래서 평일이고 주말이고 술자리가 비는 날이 있을 수가 없었다.
술 상대 중에 가장 자주 만나 마신 술친구가 중하였다.
동옥이가 한번 쓰러져 입원하고 퇴원 후부터는 나는 등산하고 하산 후 막걸리 한잔 외에
동옥이와의 술자리를 가급적 피했지만 중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언제고 술 고프면
동옥이를 불러냈다.
그런데 중하는 술 고플 때가 따로 없었다. 매일 아침 해장 하면서부터 술이 고팠다.
그러는 중하를 나무라기도 했지만 동옥이가 그렇게 급하게 갈 줄 알았으면
술이라도 실컷 마시게 내버려둘 걸 따라다니며 말린 걸
지금 와서는 아쉬움으로 남고 후회도 된다.

그런데 동옥이 20주기이던 2년 전부터 갑호도 연락이 안 되고 중하도 연락이 안 된다.
지지난해 20주기 때 코로나로 추모 모임을 못 했고 지난해도 못 하고 이번에도 못 한다.
아예 친구들에게 연락할 엄두도 못 냈다.
동옥이 기일이 코앞에 닥쳐 와 갑호와 중하가 생각이 나고 걱정이 되지만
어디선가 둘 다 무사히 잘 있기를 바랄뿐이고
어느 날 문득,
‘종호야, 잘 있었니? 막걸리 한 잔 하자.’
하고 불쑥 연락이 오기를 기대하는 마음만 간절하다.

갑자기 변고를 당한 동옥이와 달리 혜인이는 어느 정도 예견을 하고 있었고
마지막 가는 과정을 함께 했기 때문에 그런 아쉬움은 덜 하다.
부인은 어떻게 라도 해를 넘겨 혜인이 나이 일흔은 채우고 싶어 했지만
나로서는 오히려 안도하는 마음이 컸다.
지난 해 5월에 대면 면회를 하고 나서 과연 얼마나 더 연장 될 수 있을지
혹시 내가 6월에 미국을 다녀와야 하는데 그 사이에 일 당하는 거는 아닌지 걱정이 앞섰고
지난 해 9월 말에 마지막으로 대면 면회를 하고서는 이제는 카운트다운에 들어갔구나 했는데
그 후로도 부인에 의하면 별 변화 없이 잘 지내고 있고 오히려 살이 좀 붙었다고 해서
이러다가 연말에 내가 없을 때 또 일 당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12월 초 중태에 빠지고 이틀 만에 큰 고통 없이 영면해
내가 마지막 가는 길을 챙길 수 있어 나로서는 오히려 마음이 가벼울 수 있었다.

혜인이와는 2017년 초부터 2년간 수도 없이 여수를 다녀오고
내가 다른 일정이 없는 일요일에는 혜인이네에 가서 부인과 함께
생전에 추억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혜인이가 좀 더 애착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인사 동, 남산, 명동, 덕수궁, 모교였던 경희궁, 경복궁과 북촌, 홍대 앞,
혜인이가 오랫동안 하숙하던 합정 동 하숙집 근처 절두산 성지와 한강변 등
매번 장소를 달리하며 서울의 명소를 찾아다녔는데
놀랍게도 혜인이도 부인도 대개가 처음 가 보는 곳들이라고 했다.

둘 다 남산 케이블카를 처음 타 본다고 했고 남산 정상의 여러 시설에 신기해하고
정상에서 바라보는 탁 트인 서울 전경을 좋아하며 여러 음식점에서 음식을 조금씩 사
골고루 시식도 해 보고 아이스크림도 사 먹으며 동심으로 돌아가 즐거워하기도 했었다.
나중에 장거리 여행이 불가능하자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를 다녀와 오후 4시쯤
혜인이네로 가서 부부를 태우고 행주대교 아래 한강으로 산책을 다녔다.

그렇게 여수를 다니고 서울의 명소를 다니고 행주대교를 다니며
혜인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주로 내가 대화를 이끌었지만 평소 과묵했던 혜인이가 그러면서 나하고 나눈 대화의 양이
아마 혜인이가 평생 누구와 나눈 대화를 다 합친 거보다 많았을 것이다.
이런 수많은 대화를 통해 지난 날 추억을 되새기고 혜인이의 생각, 원하는 바를 알 수 있어서  
혜인이와는 아쉬움이 덜 할 수밖에 없다.

친구들이 여러 명 문병을 갔지만 나중에는 딱히 보고 싶어 하는 친구도 없었다.
발병 초기에는 그리워하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세월이 가며 그 마음도 희미하져 갔다.
그래서 혜인이는 사람에 대한 아쉬움은 없는 상태에서 생을 마감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부인은 아직도 아쉬움과 그리움이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번 설에 혼자서 인터넷을 찾아서 전도 부치고 생선도 굽고 산적도 하고 떡도 하고
과일도 사서 격식에 맞게 차례 상을 차려 차례를 지냈다고 했다.

“그렇게 잔뜩 차려 혼자서 다 먹었을 거 아니에요? 살찌지 않았어요?”

불과 3개월이라 아직은 세월이 많이 더 흘러야 될 거 같다.

“조 박사님이요, 요양원에 보내지 마라 고 하셨거든예. 집에서 죽게 해 달라고 예.
그런데 그걸 못 지켜드려서 지금 얼마나 마음이 아픈 지 모르겠어예.
힘들더라도 집에서 제가 보살펴 드려야 하는 건 데.
조 박사 님이 저한테 해 준 거 생각하면 너무 미안한 생각밖에 안듭니더.
자한테는 제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주셨거든예.“

“ 물론 세월이 흘러 자연스럽게 상처와 아픔이 치유되어야겠지만
  이제 조 박사는 과거의 사람이고 과거의 인연입니다.
  추억을 소중히 간직해야겠지만 과거가 현재의 생활이나 미래의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조 박사도 자기 부인이 궁상을 떨며 어둠 속에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기를 원할 겁니다.
  의지할 데 없이 혼자 있다 보면 일상생활이 불규칙하게 되고 그러면 건강도 헤치게 되니까
  우선 규칙적인 생활을 하시고 하던 공부 계속하며 마음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십시오.
  아파트 뒤가 바로 백련 산이잖아요?
  산이 나지막해 왕복해야 2시간도 안 걸릴 거 같던데 운동 삼아
  매일 산에 한 번씩 다녀오시고 친구들도 만나 수다도 떨고 하십시오.“

epilogue는 책을 다 쓰고 난 후기를 말한다.
집필을 하게 된 동기, 집필하는 과정을 요약하고
집필을 하는 동안 고마웠던 사람,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원고를 교정하고 편집하고 인쇄하고 출판하는 과정에 동참했던 동료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등장인물들과 배경에 대해 간략히 설명도 한다.
추모사와 비슷한 의미가 아닐까?
다른 점이 있다면 epilogue는 작가가 직접 쓰고 추모사는 본인이 죽고 나서
다른 사람이 쓴다는 거다.
그래서 자신이 죽기 전에 자신의 추모사를 자기 손으로 한번 정리해보면 어떨까라는 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고맙다고 해야 할 사람들, 수고했다고 해야 할 사람들, 사랑했다고 해야 할 사람들,
함께 해서 즐거웠고 행복했다고 해야 할 사람들, 미안해야 할 사람들,
나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들, 그립지만 볼 수 없었던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지금 가지고 있는 솔직한 마음을 한번 작성해 보는 건 어떨까하는 생각이
epilogue를 이번 토요살롱 제목으로 정하며 문득 들었다.
2022.03.05. 송 종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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