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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호(2022-03-12 21:33:48, Hit : 129, Vote : 37
  토요 살롱 347회 " 우리 시대의 호방한 쾌남아, 오 영 호 동기를 애도하며 "

지난 일요일인 3월 6일 아침 10시경 총무 대진이가 생뚱맞은 부고를 공지했다.

서울 고 24
오 영 호 동기 별세
010-8965-5623(딸)
강남 성모병원 14호실
3월7일(월)12시부터 조문 가능
발인 : 3월 9일(수) 10시.

갑자기 머리를 세게 얻어맞고 띵해 진 거 같아 내가 읽은 게 맞는 건지
혹시 누가 나한테 잘못 보낸 거가 아닌지 눈을 부비고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봤지만
대진이가 공지한 게 확실했다.
우선은 우리 동기 중에 오 영 호란 동명이인이 있는지 내가 알고 있는 오 영 호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2006년에 발간한 동기명부를 찾아 펼쳐들었다.
나와 학창시절 문예신문 반을 같이 했으며 우석 대 교수로 정년퇴임한 김 영 호의 성을
착각한 건 아닌지도 알아봐야했다.

동기 명부상에 우리 동기 중에 오 영 호는 한 명뿐이었고
대진이에게 전화로 확인 결과 산자 부 차관을 역임한 내가 알고 있는 오 영 호가 맞았다.
그 제서야 머리가 확 비면서 아니 왜? 어쩌다가?
그렇게 공사다망하게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건강을 자신하던 친구가 이렇게 급작스럽게?
황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동기지만 20년 전 워싱턴에서 처음 만났고 그 이후로도 전화 몇 통화 외에
오다가다 어쩌다 부딪치며 두어 번 만난 게 전부지만
자그마한 키에도 공간을 다 채울 만큼 다부지고 호탕하던 기억 속의 영호와
한가로운 일요일 아침 뜬금없이 들이닥친 부고가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았다.

“ 무슨 지병이 있었나?”

“나도 잘 몰라. 찜질방 가서 제일 뜨거운 사우나 들어갔다가 그렇게 됐나 봐.”

평소 영호와 별로 친분관계가 없었다며 대진이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조문이 7일 오후부터 가능하다고 했는데 왜 그래?”

“서울 시내 장례식장이 다 차서 구할 수가 없었나 봐.”

동기들 소식통인 진규가 혹시 좀 알고 있나 해서 전화해봤더니,

“글쎄, 나도 들은 이야기밖에 없어서. 태수가 친하니까 태수한테 알아 봐”

그러고 있는 사이 워싱턴의 희경이한테서 톡이 날아왔다.

“ 잘 있지?
  오 영호가 갑자기 타계했다는데 무슨 일이야? “
그러면서 조화를 부탁했다.
영호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미국 대사관에 사무관 시절, 과장 때, 그리고 국장으로서
세 번을 근무했다고 한다.
당연히 워싱턴 터주 대감 희경이와 가족 단위로 친분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태수는 거의 정신 줄을 놓고 있었다.

“ 종호야, 좀 이따 하자. 시간이 좀 지나고 지금은 너무 슬퍼 무슨 말도 하기 싫다.
  나보다는 치삼이와 석태가 제일 친했었어.“

“서울공대 같이 다니지 않았어?”

“고1때 한반에서 만나 친하게 된 친구들이 우연하게도 서울 공대도 같이 같거든.
우리들끼리 단톡 방도 있고.“

“영호가 본교 출신이야?”

“응, 본교, 공대는 화공과.”

3월 7일, 월요일은 점심부터 선약이 계속 이어져 다음날 다녀오기로 했는데
다음 날인 8일은 신우 회 3월 정례예배가 있는 날이라 5시까지 신촌 창천교회로 가야 해
비교적 한가한 시간일 거 같은 2시쯤 빈소에 도착하려고 일정을 잡았다.

그러는 사이 또 부고가 날아들었다.
건대 의대 교수로 정년퇴임한 장 성훈 부친상이었다.
마침 빈소가 같은 강남 성모병원 장례식장이라 영호 문상 가는 김에
성훈이 네도 잠깐 조문할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은 충분할 거 같았다.
나는 지난해부터 내가 생전에 인사를 드리던 부모님들이거나 상주와 아주 절친이 아닌 한
동기 부모나 장인 장모 상에는 조문하러 가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우리 나이가 이미 칠순에 이르러 우리 자신이 생의 말미에 다달았을 뿐 아니라
생존해 계신 부모님들은 대부분 아흔을 넘겨 천수를 누리신 분들이라
구태여 애도를 나누거나 위로하러 갈 일이 아니라는 게 이유라면 이유이다.

성훈이 내외는 십 수 년 전 워싱턴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동기이지만 그 때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일학년 때는 불어, 독어 반, 2학년 이후로는 문과 이과로 나누어져
학창시절에는 만날 계기가 없었고
의대를 진학한 성훈이와 그 이후 동기 모임 등에서 우연히 부딪친 적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서로 인사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없었었다.
기억하건데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고
성훈 내외는 아마 무슨 학회 같은데 참석하러 미국 여행 중이었던 거 같았다.

그러다 10여 년 전 동기 봄 야유회에서 두 번째로 만났다.
그 때 충주 호, 고수 동굴 등 단양 일대를 둘러보는 일정이었는데
성훈 내외가 나를 먼저 알아 봐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 때야 안 사실이었지만 성훈이는 건대 의대 충주 분교에 근무해 거주지가 충주라
집에서 차로 30분도 안 되는 거리로 동기들이 야유회를 오는 바람에
모처럼 동기 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다고 했다.
성훈 내외와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부인이 충주에 한번 시간 내 놀러 오던지
지나는 길에 꼭 들리라고 했지만 여태 못 가고 있다.

하지만 영호 문상을 간 김에 성훈 부친상도 조문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부고에 발인예배를 서빙고 온 누리 교회에서 드린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부친이나 성훈이가 내가 다니는 서빙고 온 누리 교회 교인일 수 있다는 건데 그게 궁금했다.

조문을 하고서야 안 사실이지만 성훈이 부친은 놀랍게도 온 누리 교인이라면
함자를 모를 수가 없는 전 교인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장 응 복 원로 장로님이셨다.
이 것도 조문하고서야 안 사실이지만 성훈 네는 7대째 기독교 집안으로 시초인 고조할머니가
조선말에 성경에 대한 정규 교육이 전무했는데도 선교사로 사역 하셨다고 한다.

장로님은 평양의전을 나와 전쟁이 발발하자 혈혈단신 월남하여 갖은 고초를 겪으며
국군에서 군의관으로 종군하신 후 한남 동에 장 의원을 개업하여 일생을 한국의 슈바이처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시며 근검하게 사시다 평생 모은 전 재산 113억 원을
온 누리교회와 자매 관계인 포항 한동 대에 기증하신 이 시대의 귀감이자
사표가 되는 분이셨다.
이것도 조문 후에 성훈이로부터 들은 이야기지만 장로님이 전 재산을 기증하기 전에
물론 큰 아들인 성훈이를 필두로 세 아들이 모두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세 아들로부터 상속 포기 서를 쓰게 하셨다고 한다.
우리 온 누리 교인이라면 누구나 우러러보는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을 실천하신 장로님이
성훈이 부친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영호 빈소는 조문객이 이어지고는 있었으나 점심때가 막 지난 어정쩡한 시간대라
역시 예상한대로 한산한 편이었다.
그래서 유가족들과 영정 앞에서나마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빈소는 뜻밖에도 가톨릭 의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헌화를 하고 묵념으로 기도를 마치자 상복차림의 아들, 딸, 부인이 나란히 서서 맞아주었다.

“ 얼마나 상심하셨겠습니까? 저는 송 종 호라고 하는데 영호와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저희 가족이 20년 전 워싱턴으로 이주해 제가 연말이면 미국으로 가는데
  그 무렴 영호도 미국에서 임기를 마치고 귀국했으나 가족을 두고 가 연말에 3박 4일로
  가족 방문 때 만나곤 했습니다.
  3박 4일에서 비행시간 제하면 딱 하루 집에서 자는 건데 그래도 저희 동기들 모임에 나와
  꾸벅꾸벅 졸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납니다.
  영호는 스스로를 너무 혹사하며 살지 않았나 싶네요.“

부인이 고개를 크게 끄떡였다.

아들을 보고,

“ 미국에 있다고 들었는데 왔구나. 아버지가 네가 콜롬비아 들어갔다고 엄청 자랑했었는데.
  우리 작은 애도 콜롬비아 가고 싶어 했지만 못 갔어.
  우리 동기들 자녀 중에는 홍 희경 아저씨 알지? 그 아저씨 아들이 콜롬비아 갔고
  그러고는 없어."

딸이 받아서,

“ 아 그래요? 예가 콜롬비아에서 학사, 석사 취득하고 박사과정도 마쳤어요.”

딸, 아들, 부인, 가족이 모두 희경이를 잘 알고 있어 홍 희경 이름이 나오자 반색을 했다.
부인이,

“ 지난 해 홍 회장님 모친상에 다녀왔거든요.
  홍 회장님이 굉장히 반가워하고 조문 와 줘서 고마워하더라는 이야기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희경이가 급작스런 소식을 듣고 아연실색해서 어떻게 된 거냐며
우선 자기 이름으로 조화를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슬픔을 함께 나누고 유가족들에게 깊은 위로의 말을 전해달라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영호가 성당에 다녔던가 보지요? “

“예, 오래 전 1979년에 저희 부친께서 돌아가시면서 유언으로 성당에 다니라고 하셔서
그 때부터 우리는 모두 가톨릭인데 애 아빠만 안 다니다가 제일 늦게 2000년경부터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늦게 된 사람이 가장 빠를 수 있다는 성경말씀처럼
애 아빠가 가장 열심이었어요. “

“아, 그렇게 된 거군요. 그럼 이렇게 생각합시다.
생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니까 하나님이 급하게 영호를 데리고 갈 일이 생겼나 보다,
워낙 일을 좋아하고 잘하고 한시도 쉴 줄을 모르니까
천국에 영호가 해야 할 무슨 급한 일이 있어 영호를 급작스레 데려갔는가 보다, 이렇게요.“

뭐 별로 동의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화를 나누며 편한 마음이 들었는지 딸이,

“ 아버지가 코로나 확진 되어 격리를 마치고 다 나아 주말에 몸이나 풀러 가자며
  다 같이 찜질방에 갔었거든요. 아버지가 사우나에 들어가시면 5분도 안 돼 나오시는데
  5분이 넘어도 안 나오시기에 들어가 봤더니 옆으로 누워 주무시는 거예요.
  그래서 흔들어 깨우려고 했는데 이미 숨이 정지 돼 심폐 소생술을 40분을 넘게
  했는데도 소용이 없었어요.“

“ 아, 그렇게 된 거 군요. 창졸간에 당한 일이라 얼마나 당황하고 놀라셨겠어요?
  슬픔은 또 어떡하구요.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우리가 죽음을 맞이할 때 고통 없이 순식간에 숨을 거두기를 모두가 소원하지 않습니까?  
  이런 말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유가족들이야 아쉬운 마음, 비통한 마음
  어디다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만 한 편으로는 당사자인 영호는
  복 받았다고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영호는 워낙 부지런하게 살아 스스로 압축시키며 산 삶을 풀어보면
  아마 보통 사람 200년 어치는 될 겁니다.
  본인은 아쉬움이 많을지 모르지만 객관적으로는 평생 풀가동 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희경이에게 문상 다녀온 경과를 톡으로 보내줬더니 지난 해 7월 희경이 모친상에
영호가 치걸이와 같이 다녀갔다고 해 치걸이에게 전화를 했다.

“ 무슨 이런 일이 있어? 나하고 용환이, 영호, 이렇게 셋이 행시 동기야.
  나는 경제기획원, 용환이는 재무부, 영호는 당시 상공부로 갈라졌지만
  아주 친하게 지냈었어. 부부 동반해서 자주 만났고.
  게다가 셋 다 52년 용띠라서 더 친밀감이 있었지.
  영호는 워낙 성격이 외향적이고 쾌활한데다 친화력이 대단해 마당발이었어.
  모르는 사람이 없고 안 걸리는 데가 없었어.
  너도 알잖아? 껄껄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이야.
  나는 용환이보다는 영호와 더 친했었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라 현직이 SK 그룹 계열사 이사회 의장이야.
  기사 딸린 차와 비서 제공 받고.
  발인 미사에 참석했었는데 변 동원이와 치삼이가 왔었어.
  치삼이와는 워낙 친해 치삼이가 부인과 아들을 대동하고 조문하러 왔었는데
  나는 발인만 참석했지만 치삼이는 화장터는 물론 장지까지 동행한다고 하더라. “

용환이에게도 전화를 했다.

“ 야, 종호야,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냐? 나는 지금 맨붕 상태야.
  영호와는 아주 친하게 지냈었지. 같은 시기에 미국에서 같이 지낸 적도 있고.
  바로 얼마 전에도 부부 동반해서 식사를 같이 했거든.
  이렇게 가 버리니 아무 것도 아니잖아.
  장례식장이 다 풀이라 일요일 하루 종일 장례식장 찾으러 헤맸어.
  그러나저러나 죽고 나면 무슨 소용이야. 말짱 꽝이잖아.
  무엇보다 애들이 장성했는데 둘 다 출가를 못 시켜 그게 마음에 걸릴 거야.
  종호야, 이번에도 절실히 느꼈는데 살아 있을 동안 자주 보자.“
  
  어제 치삼이에게 전화를 했더니,

“ 어 종호, 문상 갔다니 고맙다. 너도 영호와 에피소드가 좀 있었구나.
  나 지금 삼우제 지내러 장지에 와 있어. “

딸내미와도 통화를 했다. 내가 문상 갔을 때를 이야기 하며 누구라고 상기시켜줬더니,

“ 아, 예, 기억이 납니다. 우선은 어머니가 안정하시도록 돕는 일입니다.
  주무시다가도 아버지를 찾고 해서.
  집에만 계시지 않도록 바깥에 뭔가 취미를 붙일 수 있는 소일거리를 찾아드리려고요.
  사실 다음 주에 동생이 미국으로 돌아갈 거라 저와 어머니 돌만 남는데
  그래도 다행히 제가 딸이라서 어머니와 함께 할 수 있는 게 많거든요.
  동생이 박사 논문을 잘 마칠 수 있도록  그거도 서포트 해 줘야 하고요.
  동생의 전공이 경제학인데 박사 학위 논문이 국제 금융에 관한 거거든요.  
  동생이 힘들어 하고 있지만 아버지가 원하시던 바고 해서
  잘 마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해요.
  그래도 제가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영국으로 건너가 거기서 석사를 하고 취업해 있다가
  2012년에 잠시 귀국한다고 왔는데 그 때 마침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해서
  차일피일 미루다 못 갔는데 그러면서 그래도 아버지와 10년 가까이 같이 있었거든요.
  제가 계속 해외에 있었더라면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이 너무 없어
  후회도 크고 아쉬움도 많았을 텐데 그래도 그게 위안거리가 됩니다.
  저는 미국에서 초, 중, 고 대학을 나오고 영국에서 5년을 살았거든요.
  동생은 고교부터 미국에서 다녔고요.“

재선이도 23회 선배와 같이 하는 단톡 창에 그 선배가 23회 다른 동기로부터 받은
영호에 관한 글을 단톡 창에 올린 걸 나한테 전달해줬는데 그 내용은,
영호가 수요일에 코로나 격리를 마치고 목요일에 그 23회 선배와 점심을 같이하고
금요일에는 후배들과 저녁을 하고 토요일 저녁에 가족들과 찜질방에 가서 사우나하다
변을 당했다며 코로나 완치되더라도 장기 등에 손상이 왔을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는
일부 전문가의 의견을 인용하며 코로나 후유증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라는 추측이었다.

나는 영호와 겨우 몇 번 통화를 하고 한두 번 오다가다 우연히 만나 가볍게 인사를 나눈
정도에 불과해 무슨 추억거리나 에피소드가 있을 수 없지만
20여 년 전부터 나와는 막역하게 지내며 영호와 같이 산자부에 근무하던 25회 후배로부터
꾸준히 근황을 들어왔었다.
서울 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행시를 일찌감치 합격하여 영호보다 몇 년 먼저 공직생활을
시작해 산자부에서도 선배였었던 이 후배는 영호가 승승장구하며 자기를 추월하여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오히려 영호 형은 산자 부 내에서는 리더십이나 업무 성과나
누구나 인정하는 장래 산자 부 장관이 될 재목이라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었다.

그러나 노 무현 대통령 시절 산업 정책 비서관으로 청와대에서 1년 간 근무한 경력 때문에
노 무현 사람으로 찍혀 이후 이 명박, 박 근혜 정부를 거치는 동안
개각 때마다 후보 영순위에 올랐지만 지면만 요란하게 장식하고 정작 입각은 못 하였다.

영호의 갑작스런 부고를 받고 이 25회 후배와 통화를 하며 안타까워만 하다
추모 삼아 그저께 영호와 평소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다른 25회 한명과 셋이서
점심을 같이 했는데 자기도 첫 날 빈소를 다녀왔다며
영호의 갑작스런 타계를 누구보다 애통해했다.

영호가 산자 부 차관으로 재직할 때 무슨 일로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차관 실에 전화를 해 비서에게 메모를 남겼더니 이내 전화가 왔다.
내 이야기를 찬찬히 듣고는 바로 담당 부서로 연결해 주고 부서장에게 주지해주는 바람에
일을 최단 코스로 지체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러고 영호가 무역협회 부회장 시절 인천시가 영종도에 대규모 Exhibition을 개최할 수 있는
전시관 건립 계획을 세웠지만 투자자 유치를 못해 진척이 지지부진해
일산 KINTEX의 소유자인 무역협회와 협의 할 일이 있어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이 때도 마찬가지였다.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즉답이었다.

“인천에서 그런 계획이 있다면 초창기 입안부터 우리가 참여할게. 25%지분도 투자할게.”

그러고 한두 번 만났는데 한결 같은 인상은 항상 껄껄 웃는 표정으로
호방한 성격에 거침이 없었다.
나만 그런 인상을 받은 게 아니었다.
동기들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기 때문에 영호에게 부탁을 한 적이 있다면
누구든 신세 안 진 동기가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 이런 이야기도 했다.

“ 영호가 말이야. 이러는 거야.
  ‘내가 언제까지 이 자리에 있을지 모르니 내가 힘이 있을 때 내가 도와 줄 거 있으면
   주저 없이 이야기해라.‘ “

언젠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미국에서가 아니었나 싶은데 동기들과의 저녁 자리에서
새해 첫날을 어떻게 보내는지가 주제에 올랐었는데 중구난방으로 이야기가 엇갈리는 가운데
그냥 껄껄 웃으며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영호에게 누가 ‘영호는 연초를 어떻게 보내냐.’ 고
묻자 뜻밖의 영호 대답을 듣고 숙연해진 적이 있었다.

“ 어, 나는 말이야. 보통은 1월 초하룻날 새벽에 태백산 정상에 올라 동해에서 떠오르는
  해돋이를 맞으며 천제 단에서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기도를 해. “

이런 말을 할 때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쫙 내려 깔거나
아니면 반대로 톤을 쓸데없이 높이거나 하여 좌중의 주의를 집중시키려고 하는데
영호는 싱글싱글 웃는 표정 그대로 자연스럽게 ‘당연 한걸 뭐’ 하는 식으로
아주 태연하게 말해 오히려 좌중을 얼어붙게 했다.
심각하게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결의에 찬 모습으로 이야기했으면
오히려 거부감을 불러 일으켰을지 모른다.
‘좀 높은 자리에 있다고 꼴 값 떨고 있네.’ 하고 속으로 빈축을 사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영호는, ‘당연 한걸 뭐 그런 걸 물어보냐. 다들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래.’
라 듯이 새해 새벽에 태백산 정상에 올라 천제 단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 드리는 걸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일상적인 일 중의 하나인 듯이 말했다.

영호는 주미 대사관 근무 시절 그 바쁜 와중에도 제퍼슨 미 3대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으로보다 버지니아 대학 설립자로 비문에 새겨지길 바랐을 정도로
제퍼슨 대통령의 자부심이자 자랑이었던 미국의 명문 버지니아 주립 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경희 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생을 주어진 몸의 한계를 100% 이상 가동하며 잠시도 쉬지 않고 풀로 달린 영호가
천국에서는 편히 쉬며 하나님 곁에서 영면하길 기도드리며,
2022.03.12. 송 종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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