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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호(2022-04-17 17:31:41, Hit : 150, Vote : 32
  토요 살롱 350회 " 가슴 아픈 이별 들 "

주 초에 며칠 간 빗방울이 오락가락하며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숲과 산등성이, 가로를 화려하게 장식하던 연분홍, 하얀 벚꽃이
오락가락 가랑비를 동반한, 계절이 되돌아가는 듯 오싹 몸을 옴츠리게 하는 쌀쌀한 강풍에
획 공중제비 두어 번 돌며 팔랑팔랑 낙하 도중에 머리 위에도 앉고
어깨 위에도 앉으며 다 떨어져 보도 위에, 공원길에, 숲 속 오솔길에 수북이 쌓이는가 하더니
어느새 그마저 바람에 실려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이렇게 또 다시 벚꽃이 피고 졌다.

둔덕을 따라 가지런히 관목 숲을 이루고 있는 개나리도 그토록 관능적으로 눈을 현혹시키며
그 눈부심에 살짝 몸을 전율시키기까지 하던, 그 강렬했던 샛노란 꽃잎이 다 지고
꽃잎이 떨어진 자리에 짙은 초록색 새 잎이 돋아나고 있다.
아직도 겨울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차가운 날에 갑자기 벌레가 우르르 기어 나오듯
앙상하고 메마른 가지를 어느 날 문득 연두색으로 점점이 점 칠한 산수유도
봄의 전령사로서의 역할을 다 하고 앙증맞은 꽃잎이 있던 자리를 푸르른 이파리가
대신 자리 잡았다.
벚꽃이 피며 뒤를 따라 피어난 하얀 목련만이 여전히 송이가 탱글탱글 탐스럽다.

금년 봄도 아직은 중국 발 미세먼지와 황사현상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대기가 깨끗하고 청정한 날의 연속이다. 숨을 들이킬 때 폐부의 느낌이 상쾌하기 그지없다.
신기하게도 코로나 이후 이런 현상이 3년째 지속되고 있다.
지난 해 봄에 3월과 5월 초에 심한 황사현상이 나타났지만 이 때도 하루 이틀 그러다 말았다.
물론 금년에도 지난 달 말에 하루 이틀 약한 황사현상이 있었지만 예년에 비 할 바가 아니다.
코로나 첫 해에는 중국 공장들의 셧다운 때문이라고들 하였지만 미세먼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내몽고 사막과 고비사막이 발원지라는 황사가 사라진 건 어떻게 설명이 되지 않는 거 같다.
황사 피해가 가장 클 수밖에 없는 중국에서도 아직 황사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겨우내 바짝 마른 사막의 모래와 황토가 봄에 바람을 타고 중국 전역을 돌며
온갖 유해물질을 싣고 서해를 넘어 온다는 황사현상이 뜸해지려면
봄에 불던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든가, 겨우내 사막에 충분한 비나 눈이 내려
먼지가 일어나지 않았던가, 사막에 나무를 심어 바람을 막아주든가 해야 할 텐데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너무나 고마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하기야 중국이 수십 년 동안 사막 남쪽 가장자리에 병풍용으로 수백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왔고 계속 심고 있다고는 하고 몽고에서도 나무를 심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4월은 거의 한달 내내 황사가 해를 막아 뿌연 하늘에 눈도 맵고 코도 따갑고
숨을 쉬면 먼지가 호흡기에 들어붙는 거 같은 고통에 시달리느라
온갖 기화요초가 형형색색 꽃을 피우는 찬란한 봄의 향연을 감상하기는커녕
파란 하늘 한번 제대로 못 보고 숨 한 번 제대로 크게 못 쉬며 콧물에 재채기에
오히려 잔인한 달이 되어 역풍인 동남풍이 불어오는 6월이 오기를 학수 기다리곤 했었는데
금년에도 지난해와 지지난해처럼 깨끗하고 상쾌한 대기와  
폐부를 시원하게 뚫어주는 쌀쌀한 바람과
세찬 바람에 흩날리는 봄비와 숲과 산야의 신선한 초록과
아지랑이 피는 아련한 하늘의 얕은 푸르름과 온갖 꽃들의 형형색색 화려함을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토요 살롱 348회 ‘어느 특별한 결혼식’에서 아버지 홀로 자녀를 출가시킨 경우를
내가 깜빡하고 우리 동기 중에서 김 훈의 외아들 경우만 예를 들었는데 구 재수도
자녀 둘을 부인 없이 혼자서 키우고 출가 시켰다.
재수는 아이들이 한 참 사춘기인 중 고등학교 다닐 때 부인을 잃었다.
혼자서 두 자녀를 잘 키워 훌륭한 배필과 짝을 지어주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럴 경우에 혼례식 순서 중 양가 부모님들에 대한 인사는
생략했으면 어떨까 싶다. 혼자서 신랑신부에게 절을 받고 맞이하는 모습이 너무 짠해 보였다.
하기야 요 몇 년 사이 참석한 결혼식 중에 부모님들이 모두 멀쩡히 계시는데도
어차피 폐백도 하고 신혼여행 다녀와서도 양가에 인사하러 가야 하는데
구지 결혼식장에서 보여주기 마냥 양가 부모님들에 대한 인사를 순서에 넣을 필요가 없다면서
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동기들이 먼저 떠나는 바람에 홀로 된 미망인들도 많지만
상처를 하고 홀로 된 동기들도 상당수 있는 거 같다.
그 중에는 다행히 재혼을 하여 새 삶을 시작하며 상처가 아물고
슬픔을 극복한 친구들도 더러 있지만
여전히 혼자서 홀아비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들도 꽤 있는 거 같다.
훈이도 혼자고 재수도 여전히 혼자다.
그런데 남자가 상처하고 홀아비로 사는 모습은 어쩐지 궁상맞고 측은해 보인다.
선입관 때문인지 본인이 씩씩한 체 하면 할수록 더 불쌍해 보인다.

이혼을 하고 혼자 사는 경우도 있고 요즘 생긴 신조어로
자녀들, 친인척과의 관계나 주변의 시선 때문에 법적인 명목상의 부부관계는 유지하더라도
상호 합의하에 재산을 나누는 등 사실혼 관계는 종료하고
각자 독립된 삶을 사는 졸혼이라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 경우들은 자신의 의지와 필요가 어느 정도는 관철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된 사유를 대체로 상대방에다 전가하는데다 미련이나 아쉬움보다
상대방에 대한 괘씸함과 미움이 더 커 이야기 듣고서 바로 뒤돌아서서,
‘개 말이야, 이혼했대. 뭐 어쩌고 핑계 대지만 여자가 오죽하면 이혼도장 찍겠어?’
라고 손가락질하고 빈정댈 수도 있겠지만 당장은 그 앞에서는 적당히,

‘야, 잘 했다. 결단 잘 내렸다. 그렇게 하고 어떻게 같이 살아? 너니까 그나마 참고 살았지.
우리 같으면 벌써 쫑 냈어. 이제 홀가분하겠구나. 툭툭 털고 제2 인생을 멋지게 사는 거야‘

위로하기 보다는 아무 감정 없이 입에 발린 말로 오히려 맞장구 쳐 주는 정도로
가볍게 대하며 누구에게 옮기기 좋은 안주거리로나 여기겠지만  
상처의 경우는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당한 일인데다 대체로 우리 세대는
은연 중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남존여비 사상이 뿌리깊이 박혀 있어
집안 일, 육아, 교육 등 가정 사를 부인 혼자서 감당케 했고
그런 부인에게 늘 마음 한구석에는 미안하고 고맙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고리타분하고 쾌쾌 묵은 남자라는 체면 때문에 쑥스러워 그런 표현을 못 하고
애정표현은 더더욱 입 밖에도 내지 못하고 있다가
세태도 변하고 여유도 좀 생기고 해서 아내를 위해 뭐 좀 해 보려는 차제에  
야속하게도 아내가 먼저 떠나버리니까 반평생 함께 한 아내를 먼저 보내는 애통함에 더해
구지 말을 하지 않더라도 먼저 간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아쉬움이 절절히 배어나오는데다
축 처진 어깨에 퉁퉁 붓고 시뻘개 진 눈에 눈물이 가득하고 얼굴에 없던 주름이 패이는 등
수척하고 초췌해져 조문객을 맞는 모습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애처롭고 가련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또한 모든 걸 마누라에 의존하고 살면서 때로는 다투기도 하고 심하게 싸움도 했겠지만
대체로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마음대로 부려먹을 수 있는
유일한 꼬봉으로 막 대하다 이제 그런 대상이 사라진 허전한 마음에
집에 들어가면 반기던 구박을 하던 그런 상대가 없다는 쓸쓸함과
이제는 잡다한 집안일을 스스로 해야 한다는 불편함까지 감당하며 살아야 할 거라는
측은한 마음에 가서 직접 위로의 말이라도 전하고 이야기라도 나누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상처를 하면 가급적 조문을 가려고 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반려자를 잃었으니 나머지 인생은 반쪽짜리 인생인데
이런저런 위로의 말은 할 수 있겠지만 솔직히 말해 뭘 한들 뭐 그렇게 즐겁고 좋은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김 기영이와 나는 평소에 자주 교분을 나누는 사이는 아니었다.
동기 회 모임에서 어쩌다 자리를 같이하거나 동기들 경조사에서 우연히 부딪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정도의 사이었다.
사적으로 만나 식사를 하거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다른 동기들로부터 그리고 서울 상대를 같이 다닌 25회 후배들로부터
단편적으로 들은 이야기는 있지만 누가 뭘 했는지 뭘 하는지 별로 관심이 없고
누가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잘 담아두지 않는 스타일이라
학창시절에 기영이와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이 없는데다 대학도 다르고
졸업하고도 다른 길을 걸어 기영이의 하는 일이나 과거에 대해 들은 이야기는 있지만
기억하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기영이가 얼굴 자체는 길다란 말상의 수재 형에 약간 날카로워 보이지만
동안의 불그레한 안색에 항상 미소 띤 표정이 전체 분위기를 한결 부드럽게 해 주는데다
억양도 상냥하고 대화할 때 절대 상대방 말을 도중에 가로막거나 토를 달지 않으면서
주로 듣는 편이고 말을 할 때는 절대 과하지 않고 전문성을 가지고 정확해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하는 그런 기영이의 태도와 모습은 뚜렷이 기억에 남아 있다.

총무 대진이가 태수 부고를 공지한 일주일 만인 4월 12일 오전 9시에
기영이 부인 부고를 공지했다.
태수를 보내고 불과 며칠이라 태수가 남기고 간 자취가 여전히 눈앞에 어른거리는 상태였다.
조문은 당일 오후 5시 이후부터 가능하고 발인은 이틀 후인 4월 14일이라고 했다.
장지가 미정이라니까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일을 당한 거 같았다.
우선 내가 알고 있는 김 기영이가 맞나 해서 새삼 동기회 명부를 들쳐보았다.
우리 동기 중에 김 기영이는 한 명뿐이었다.

일정을 보니까 다음 날 강남에서 점심약속이 있어 점심 후 조문을 다녀올 수 있었다.
지난주에 태수 조문을 다녀오고 발인에도 참석한 아산병원이었다.
일주일 전 성내 천 뚝 길을 아치를 만들어 하늘을 가리켜 흐드러지게 피었던 연분홍 벚꽃은
비바람에 다 떨어졌고 벚나무 뒤를 받치며 벚나무 줄을 따라 나란히 작은 숲을 이루며
노란 꽃잎이 줄기를 가릴 정도로 빽빽이 피었던 개나리꽃도 듬성듬성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얼마 남지 않고 다 떨어졌고 그나마 매달려 있는 꽃들도 색에 빛을 잃고 있었다.

빈소의 제단은 입구 왼쪽에 기독교인 조문객을 위해 헌화 할 국화 다발이 놓여 있었지만
전통 유교식으로 차려져 있었다.
나는 기독교인이지만 그런 거를 가리지는 않고 상가의 의식에 따른다.
분향을 하던 헌화를 하던 다 같이 망자에 대해 예를 갖추는 방법이고
목례를 하던 절을 하던 그것도 망자에게 작별인사를 고하는 의식이다.

그렇다면 내 방식이 아니라 망자에게 익숙한 방법으로 예를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차려진 제단에 따라 헌화도 하고 분향도 하고 목례로 묵념도 하고 절을 하기도 한다.
그게 망자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표하는 거라는 게 나 혼자만의 생각이다.
또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성경에 기독교인이라고 분향을 해서는 안 되며
절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구절도 없다.

여호와가 ‘나 이외의 신을 숭배하지 말라.’ 라는 구절을 들지만
망자에게 절을 하고 분향을 하는 거가 또 다른 신을 숭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돌아가신 분과 속세에서 이별하며 고별인사를 드리는 방법 중 하나다.

제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기일이나 명절에 음식을 장만하여 제를 드리는 건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서지 신으로 모시고 숭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거기에 무슨 획일적으로 정해진 의식이 있을 수가 없다.
종교는 가르침의 핵심을 이해하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게 중요하지
규정을 정해 너무 격식에 치우쳐서 그 격식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며
전례의 관습과 일상생활에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개개인의 자유를 쓸데없이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빈소에 들어서면서 조문 실을 들여다보니 기영이가 안 보여 기영이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접객 실에서 손님과 대화 중이던 기영이와 눈이 마주치자 기영이가 이내 알아보고
바로 달려왔다.
‘기영아, 나 송 종호야.’
마스크를 쓴 데다 만난 지 오래 돼 혹 기영이가 못 알아볼까 해서 먼저 이름을 밝혔다.
‘알아, 송 종호, 와 줘서 고맙다.’
시뻘겋게 충혈 되고 눈물 자국이 마르지 않은 눈이 눈웃음을 지으며 반가워하고
마스크 안의 입도 마스크 겉으로 미소 짓는 모양을 짓고 있었지만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고 불그레한 혈색은 그대로였지만
얼굴도 몸도 몰라보게 초췌해져 있었다. 입고 있는 양복이 헐렁해 더욱 안쓰러웠다.
머리숱이 아직도 빽빽했지만 몇 가닥 보이는 흰머리가 더욱 애처롭게 보였다.

분향을 하고 망자에게 인사를 드린 후 기립하고 있던 상주들과 목례로 인사를 마치자
기영이가 아들과 딸 내외를 소개시켜 주었다.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어떻게 해?’
딸이 아버지를 돌아보며,
‘저희들보다 아버지가.’

접객 실로 자리를 옮기자 뜻밖에도 혼자 무료하게 앉아 있던 영재가 반겨주었다.
‘오늘 진료 안 해?’
‘아니야, 마침 예약 손님이 취소를 해 시간이 비었어. 병원이 여기서 가깝잖아.’
‘기영이와 친한가 보구나.’
‘그럼, 학교 때부터 서로 잘 알지.’

영재를 만나면 채식에 관한 이야기를 빼 놓을 수가 없다.
영재는 30년 이상 일체의 육식을 금하고 철저히 채식을 지키고 있다.
술 담배, 입에 대지도 않고 달걀도 안 먹는다고 한다.

“나는 아직도 육식을 좋아하고 자주 먹는 편인데 너는 풀만 먹어 몸이 깨끗하겠구나.
무병장수 하겠네.”

영재가 흡족한 듯 환하게 웃으며,

“그럼, 혈관에 찌꺼기 하나 없이 아주 깨끗해.
그런데 우리 이렇게 상가에서나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한번 약속을 해서 밖에서 만나도록 하자. “

“그건 좋은데 너는 술도 안 마시고 음식점도 풀만 주는 음식점으로 가야 할 거 아니야?”

“하하, 물론 그렇지.”

영재를 만나면 동훈이 생각이 나 자연스럽게 동훈이 이야기를 한참 나누게 된다.
다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고 몇 번씩 주고받은 이야기지만 상대방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주며
아쉬운 마음에 똑 같은 이야기를 또다시 되풀이하게 된다.
동훈이 생전 이야기를 더듬으며 당시의 우리 모습을 동시에 떠올리게 된다.
가슴 아린 추억여행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이마저도 점점 희미하게 희석이 되고 있는 거 같다.
영재는 동훈이가 떠난 연도도 가물가물해했다.
지난 해 12월 5일 동훈이 3주기는 혜인이 망일과 겹쳤다.
영재가 창명해 거북이 구자를 쓴다는 구우 회11명 중에 동훈이와 영규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영재의 도움으로 이 둘의 추모사를 내가 정리했었다.

영재에 의하면 2019년에 약사인 기영이 부인이 어깨가 결리고 아프다며
기영이가 영재에게 정형외과를 알아 봐 달라고 해서 잘 아는 정형외과를 소개해 줬는데
정형외과에서 검진을 해 보고는 정형외과 소관이 아닌 거 같으니
빨리 큰 병원으로 가 보라고 해 가서 검진 결과 폐암 판정을 받았다고 했다.
최초 검진 시는 몇 달 못 갈 거라고 했으나 3년을 더 버텼다고 했다.
기영이에 의하면 그 동안 좋았다 나빠졌다 반복했지만 최근에는 상태가 좋아
별로 대비를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급격히 악화되었다고 한다.
다행히 식구들이 모두 임종을 함께 할 수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될 수 있었다고 했다.

“기영이가 부인이 아프지 전에는 이렇지 않았어. 풍채가 좋았거든.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으면 2,3년 사이에 이렇게 몰골이 될 정도로 수척해지고.
이 봐, 살도 없지만 근육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잖아.“

영재가 기영이 팔을 만지면서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근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기영아, 산 사람은 살아야 되잖아. 우선은 장례도 치르고 해야겠지만 끼니 거르지 말고
운동도 좀 하면서 기력을 회복하고 빨리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가기 바란다.
부인이 비록 먼저 가셨지만 부인도 니가 궁상을 떨며 힘들어하는 모습,
바라지 않으실 거야. “

그러는 동안 회계 법인을 운영하고 있는 김 계환이가 조문을 마치고 합류했다.
대화의 주제는 뻔하다.
건강과 동기들 근황이다.

영재가 다음 환자 진료시간이라며 일어서고 계환이도 사무실에 들어가 봐야 한다며
일어서는 바람에 다들 같이 일어섰다.
마침 한 떼의 조문객이 들이 닥쳐 기영이가 나오지 못하고 빈소 마루에 서서
‘와 줘서 고맙다.’며  손을 흔들어 배웅을 하는데 뒤돌아서서 마주 손을 흔들어줬지만
기영이가 마루 끝에 서서 그렁그렁한 눈으로 손을 흔드는 그 쓸쓸한 모습을
아마 한참 동안은 아픈 상처처럼 마음 한구석에서 지워지지 않을 거 같다.
유가족들과 애도를 함께 하고 고인의 명복을 빈다.
2022.04.17. 송 종 호.




토요 살롱 351회 " 無 常 "
토요 살롱 349회 " 태수야, 잘 가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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